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육사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문화운동 |
| 종류 | 집터 |
| 상태 | 이육사 생가는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태화동 672-9번지로 옮겨갔다. 빈 터에는 〈육우당유허지비〉와 〈청도포 시비〉가 세워져 있다. |
| 정의 | 민족시인이면서 의열투쟁가인 이육사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장진홍의거, 대구격문사건 |
|---|---|
| 관련 조직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
| 관련 인물 | 이육사(李陸史), 윤세주 |
| 관련 내용 |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본명은 원록(源祿)·원삼(源三)이며, 자는 태경(台卿)이다. 그는 보문의숙을 거쳐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처가마을에 있는 백학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25년 1월 귀국한 이육사는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을 벌였으며, 1926년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장진홍의거에 연루되어 1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29년 5월에 풀려난 그는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에 「말」이라는 첫 시(詩)를 발표하였다. 1931년 1월 대구격문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1932년 4월 봉천에서 의열단의 윤세주를 만나 남경으로 이동하였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1932년 10월 10일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1기생이 되었다. 1933년 4월에 이 학교를 졸업하고, 7월에 서울로 잠입하였으나 1934년 3월 군사간부학교 출신이란 것이 드러나 또 다시 구속되었다. 6월에 출옥한 이육사는 문예활동에 전념하였다. 일제의 한글사용 규제에 저항하여 한시를 쓰던 그는 1943년 4월, 다시 독립운동의 대열에 뛰어들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 활동하던 이육사는 1943년 7월 모친과 맏형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북경으로 압송된 이육사는 1944년 1월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국사편찬위원회,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 31-의열투쟁 4, 1997. ○ 김희곤, 『새로 쓰는 이육사평전』, 지영사, 2000, 35쪽. ○ 김희곤, 「李陸史의 생애에 대한 재검토 :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13, 한국근현대사학회, 2000. ○ 이육사. ○ 「부고엽서」. 「이육사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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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 881 |
|---|---|
| 주소 | 경북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59 (원천리 706)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육사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안동시에서 집터에 안내판과 청포도 시비, 그리고 <육우당유허지비>를 세워 놓았으며, 유일한 혈육인 딸 이옥비 여사를 통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