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진평동 뒷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산야 |
| 상태 | 부분 변형되었으나, 산 형태는 그대로이다. 더욱이 산 중턱 부근에 국기 게양대가 설치되어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12일과 13·14일 네 차례에 걸쳐 진평동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3.1운동 |
|---|---|
| 관련 조직 | 계성학교(啓聖學校) |
| 관련 인물 | 이영식(李永植), 이상백(李相栢), 박명언(朴明彦), 이내성(李乃成), 이영래(李榮來), 임용섭(林龍燮), 임점석(林點錫), 허도언(許道彦) |
| 관련 내용 |
구미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12일 진평동(眞坪洞)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 이영식(李永植)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진평동 이상백(李相栢)의 집을 찾으면서부터 계획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곳 인동(仁同)에서도 일어나 줄 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이상백은 이내성(李乃成)·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點錫)·임용섭(林龍燮) 등과 상의하여 거사일을 3월 12일로 정하고 거사준비에 들어갔다. 이상백과 임용섭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3월 11일에는 이상백의 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점석 등이 당일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박명언(朴明彦)과 허도언(許道彦)은 3월 12일 ‘독립선언서’를 마을 곳곳에 붙이고 계획을 주민들에게 알렸다. 드디어 3월 12일 오후 8시경 동민 200여 명이 마을 뒷산에 모였다. 이상백과 이영식은 교대로 군중 앞에 나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이를 달성하기 위해 힘차게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밤늦게 해산하였다. 한편 3월 13일 오후 4시경 마을 뒷산에서 동민 약 20명이 다시 만세운동을 일으켰고, 이날 저녁 9시에 또다시 동민 약 30명이 마을 뒷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3월 14일 오후 9시경 동민들이 다시 마을 뒷산에 모여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처럼 진평동에서는 연 3일 동안 4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제 경찰에 의해 주동자 33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2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
| 참고 문헌 |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40쪽. ○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Ⅰ, 동경;원서방, 1967, 366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3·1운동재판기록, 1983, 1318-1320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3·1운동사(하), 1983, 388-390쪽. ○ 「이상백 등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년 4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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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 뒷산 |
|---|---|
| 주소 | 경북 구미시 진평동 산8-2임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상백 등 판결문」과 『독립운동사』 3권에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2009년 현일고등학교 전정중과 진미동사무소 이창수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한 바 있으며, 2018년 다시 확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