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임옥여 집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임옥여 생존 당시 집은 '一'자 형태의 초가였다고 한다. 현재 현대식 가옥으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
| 정의 | 1907년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좌익장으로 활약한 임옥여의 거주지이자 순국지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이천창의소, 일진회 |
| 관련 인물 | 이근풍 |
| 관련 내용 |
임옥여(任玉汝, 1872.4.29.~1907.11.10)의 본명은 경재(景宰)로 1872년 양지군 주동면 평촌리 무관장(武官將)을 지냈던 풍천임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외국어학교 부교관서차임관을 임명받고 이듬해 농상공부주사를 역임했다. 1907년 일제가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을 퇴위시키자 관직을 버리고, 같은 해 7월 이천군 신둔면 신면 남정동 이근풍(李根豊)의 집에서 포군을 모집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8월에는 이천수창의소의 좌장이 되고 21일 이천 읍내에서 일본군 기병과 교전하여 격퇴하였다. 8월 30일 이천읍에서 다시 일본군과 접전하여 부하 2명을 잃고 패주한 후 광주군 실촌면에서 다시 포군 70여 명을 모집한 뒤 용인 굴암에서 일군과 접전하였다. 9월 14일에는 포군을 인솔하여 양근(楊根)・안성(安城)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죽산군(竹山郡) 원일면(遠一面) 고초곡(藁草谷)에서 일군과 다시 교전하였다. 11월에는 광주군 상림(尙林)의 길가에서 4명, 백암(白岩) 장터에서 1명 등의 일진회원(一進會員)을 총살하였고, 또 죽산군 백암에서 순사와 순검 각 1명을 총살하였다. 임옥여 의병부대는 인근지역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쳤는데, 정주원(鄭周源) 부대와 양지, 죽산 일대에서, 김봉기(金鳳基)부대와 광주, 여주, 이천 일대에서 합류해 유격대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임옥여 의병부대 활동에 위협을 느낀 일본군은 서울의 정예수비대를 용인에 파견해 원삼면 고초골을 습격해 임옥여 의병부대에 큰 소실을 입혔다. 이에 부대를 일시 해산하고 11월 10일 장례를 치르러 집에 들렀다가 일진회 회원들과 일군 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체포된 후 총살되었다. |
| 참고 문헌 |
<地方消息一統>,《황성신문》1907년 11월 14일 2면 『폭도사편집자료-경기도편』(1909.3.16.) 「피고 김봉기에 대한 처분상주」『조선·대한제국관보』4085호(1908.5.28.) 「임옥여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황성신문』, 1907년 11월 14일, 2면 6단, 「地方消息一統」.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폭도사편집자료」, 『 독립운동사자료집』3 - 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504-505쪽. 이인영, 『내고장 용인 의병항쟁 및 독립운동사』, 용인문화원, 1989, 91-93쪽. 김명섭, 「한말 용인 항일의병의 활동과 그 특징」, 『항일독립운동사 속의 용인』,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2009, 24-26쪽. 김명섭, 『한국사가 기억해야 할 용인의 근대 역사인물』, 2015, 56~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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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양지군 주동면 평촌 |
|---|---|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평창로 81(평창리 243)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양지군 주동면 평촌리는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주동면의 평촌(坪村), 도창(都倉), 공세동(貢稅洞)의 일부를 합치고 평촌에서의‘평’자와 도창에서의 ‘창’자를 따서 평창리라 한다. 현 평창1리가 평촌 마을이다. 임옥여의 손자인 임성빈씨에 따르면, 그의 집은 평창리 243번지에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