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원용팔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시멘트 벽에 슬레이트 지붕의‘ㅁ’자형의 집이었으나 부분 변형되어 ㄱ자 형의 집이다. |
| 정의 | 1896년과 1905년 의병항쟁 당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여주·원주·제천 등지에서 의병부대를 이끈 원용팔의 가옥이다. |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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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내용 |
원용팔(元容八, 1862~1906)은 1896년 전기의병과 1905년 중기의병기에 걸쳐 활약한 의병장이다. 그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의병에 참여하였는데, 전기의병 때에 심상희(沈相禧)가 거느린 여주의병의 후군장과 유인석이 지휘한 제천의병의 중군장을 지냈다. 원용팔은 1905년 9월 중순 일제의 침략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다시 창의에 나섰다. 그는 회당 박정수(朴貞洙) 등과 재거사를 계획하고 각처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사방에 보낸 격고문에서 일본이 한국의 국토를 침탈해 가고, 조세제도와 호적제도를 일본식으로 변개하고, 한국의 황실과 예속을 형해화시킨 사실 등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원용팔은 7~8월간 원주·영월·정선 등지를 무대로 의병항쟁을 전개했다가 1905년 9월 원주진위대와 일진회의 합동작전에 의해 횡성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에도 원용팔은 종전의 기개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서울로 압송되었을 때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육군대장의 심문에 대해 그는 “풀어준다 하더라도 ‘동대문 밖에만 나가면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이며, 호응하는 사람이 없으면 집안사람들과 같이 하고 집안사람들도 호응하지 않으면 나 혼자서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원용팔은 1906년 3월 7일 수감 중에 병사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90년에는 다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묘는 여주군 강천면 걸은3리 43번 국도변 마감산 자락에 있다. |
| 참고 문헌 |
「義士三戒元公乙巳倡義遺蹟卷上」, 독립기념관 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 의병항쟁사, 1971, 333-338쪽. 「원용팔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의병수괴 원용팔에 대한 재판의 건」(『주한일본공사관기록』24권)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 1995, 50~52쪽. 권영배,「구한말 원용팔의 의병항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97. 오영교, 왕현종, 『원주독립운동사』, 원주시, 2005, 105-121쪽. 장성수, 「한말 제천지역 유림세력의 동향」, 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2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운동연구(1904~1911)』,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03. 심철기, 「1905년 원용팔 의병의 창의와 운동방략」, 『한국근현대사연구』70,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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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 가정리 |
|---|---|
| 주소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가정긴골길 131-2 (북내면 가정리 119)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국가보훈처「공적조서」에는 본적이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 서운리 451번지로 되어 있으나,『원주독립운동사』와 원용팔의 증손인 원수연(1939년생 종손이기도 함)과 가정2리 주민 원용민(1925년생) 등의 증언을 통해 관련 내용과 현재 위치를 확인하였다. 『원주독립운동사』에는 원용팔이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 가정리(현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가정리)에서 출생했다고 밝혔고, 원수연과 원용민 등도 원용팔이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가정2리 119번지에서 출생했다고 증언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