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최익현 피체지 - 화암마을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한때 수풀이 우거진 험한 곳이었다 하나,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격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마을 초입으로 화암 마을 비석 옆에 순창군에서 설치한 최익현 피체지 안내판이 있다. |
| 정의 | 태인·순창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체포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6 태인의병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최익현(崔益鉉)/임병찬(林炳瓚) |
| 관련 내용 |
최익현은 조선 말기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최익현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5적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1905년 12월에는 노성의 궐리사에서 강회를 열었다. 그는 강회에서 강의를 마치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할 방책을 제시하면서 이를 맹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1906년 6월에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봉기하였다. 정읍, 순창 일대에서 의병들이 집결하여 봉기한지 1주일 만에 포수 2,3백명을 포함하여 9백여 명의 의병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각 군을 돌면서 총기와 화약, 군자금 등을 징발하였다. 군사활동과 훈련을 위하여 내장사와 순창의 구암사 같은 사찰을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최익현과 임병찬은 순창으로 이동하여 객사에 의병 본부를 두었다. 태인의병 활동 소식에 광주관찰사 이도재는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고종의 해산 칙유를 전달하였다. 또한 전주관찰사 한진창과 순창군수 이건용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의병을 공격하였다. 6월 11일 순창에서 담양 방면으로 이동하던 최익현 등은 전주와 남원진위대의 공격을 받게 되자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던 최익현은 의병들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12의사’와 함께 관군에 체포되었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2-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51-10 3쪽.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전북의병사』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1992, 403쪽. 전북지역독립운동추모탑건립추진위원회, 『전북지역독립운동사』, 신아출판사, 1994, 151-161쪽. 편찬위원회 편, 『구림면지』, 2005, 166-167·622쪽. 박민영, 『한국독립운동의 역사』1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14-128쪽. 김상기, 「최익현의 정산 이주와 태인의병」, 『충청문화연구』7,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2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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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무림면 화암리 |
|---|---|
| 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화암리 556-6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면암선생창의전말』,『대한계년사』,『돈헌문답기』등 여러 문헌에 관련 사실과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














최익현이 피체된 화암마을(서쪽)
최익현선생 유해 환국 기록화
화암마을 원경과 화암산
최익현
최익현 피체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화암마을 전경
화암마을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