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서종채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당시의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양옥을 지어 주민 서이석이 살고 있다. |
| 정의 | 군자금 조달 및 밀정을 척결한 한말 의병장 서종채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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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서종채(徐鍾採, 1881~1916)의 자는 응호(應鎬)이며 본명은 채열(彩烈), 초명은 종채(鍾採), 별명은 응오(應五) 또는 종주(鍾珠)이다. 1907년 7월에 40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삼연(奇參衍) 의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08년 1월 2일 기삼연이 일본군에 의해 피살당한 이후 이대국(李大局) 의진으로 옮겨 25명을 거느리고 무장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을 전개하였다. 이대국이 전사하자 의병장이 되어 140여 명을 인솔하여 함평·영광·무장·부안·고창 등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함평군 성문·담양 추월산·무장 고산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부안군 하서면 청일리에서 의병에게 적대행위를 하던 밀정 최용태(崔容台)를 총살하였다. 1909년 10월 부안군 산내면 지지포(知之浦)에서 악랄한 일본인 마에다[前田熊吉]를 체포하여 격포해안에서 참살하였고, 군자금의 조달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11년 이후 일본군 수비대가 증원되고 토벌작전이 강화되자 의병의 희생을 염려하여 해산령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에 의해 붙잡혔다. 1980년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되어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隆熙3年7월~12월 暴徒에 關한 編柵」 全羅北道警務局Ⅱ, 1909년 7월 30일. 「서종채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3년 9월 27일.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전북의병사』하, 1992, 34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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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무장군 이동면 백양리 |
|---|---|
| 주소 | 전북 고창군 무장면 백양리 13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서종채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며 손자 서인후(75, 서울 구로구 거주)의 증언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














동쪽에서 본 서종채 집터 입구
서종채 집 후측면
서종채 집터 마당
서종채 집터 마을 전경(가운데 적벽돌 슬라브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