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황현 은거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는 구안실 및 일립정 터만 남아 있으며 옹달샘도 약간 변형된 상태로 남아 있다. |
| 정의 | 광양 서석마을에서 살았던 황현이 이곳 구례로 옮겨와 은거하며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1천여 수의 시를 지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0 경술국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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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구례군 만수동(현 간전면 수평리)은 황현(黃玹, 1855~1910)이 구례군 광의면 월곡(月谷) 마을로 이사하기 전까지 약 16년(1886~1902) 동안 생활하며 여러 책을 집필했던 곳이다. 황현은 서른 하나의 나이에 동생 황원(黃瑗, 1870~1944) 일가를 포함한 식솔들을 이끌고 백운산 남서쪽 만수동에 정착하였다. 이곳에 이거한 후 그는 매화나무를 심고, 개울 아래에 옹달샘을 파서 식수를 해결하였으며, 일립정(一笠亭) 등 초옥(草屋) 몇 간(間)을 짓고서 칩거하였다. 그리고 1890년에 서재인 구안실(苟安室)을 지어 시를 짓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현재 당시의 주거공간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흔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나 매화 한 두 그루와 매화샘(梅泉)의 자취가 남아 있다. 매천학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구안실 공간은 황현이 구례 월곡으로 이사한 뒤에 불탔다고 전한다. 황현의 삶에 있어서 만수동에서 생활하던 시절을 흔히 은거시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문학적으로 더욱 원숙해지고 역사가로서의 면모는 더욱 철저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명한 저술인『매천야록(梅泉野錄)』및『오하기문(梧下記聞)』과 같은 대표적인 저술이 이 시기에 시작되거나 완성되었다. 또한 그는 평생 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 중 1천여 수를 만수동에서 지었다. |
| 참고 문헌 |
황현,『 매천집』, 1911. 김정환, 「매천 황현의 '구안실신고(苟安室新稿)' 연구」, 『한문학보』 12, 우리한문학회, 2005, 427~458쪽. 홍영기, 「황현의 생애와 사상」, 『광양시지』 1, 2005, 649~659쪽. 김정환, 『매천시파연구』, 전남대 박사학위논문, 2006. 홍영기,「황현」, 『한국사 시민강좌』 41, 일조각, 2007, 176~17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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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 |
|---|---|
| 주소 | 전남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 산6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매천집』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장 조사시 문승이(86세, 구례군 문척면 월전리 거주) 씨의 증언으로 황현이 이 곳(구안실 서재와 일립정, 매화샘 등)에 은거하며 살았던 장소와 흔적을 확인하였다. |














매천시집
매천집과 매천속집
황현 영정
황현 은거지 내 매화샘
황현 은거지 터 전경
황현 은거지 내 구안실(서재) 터
황현 은거지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