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북후정 터 -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 개최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북후정은 없어지고 대구시민회관이 들어 서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 정의 | 1907년 1월 9일과 12일(음) 두 차례에 걸쳐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가 열린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동광문사/광문회 |
| 관련 인물 | 김광제(金光濟)/서상돈(徐相敦)/양기탁(梁起鐸) |
| 관련 내용 |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의 특별회의에서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 10여 명의 공동 발기인 이름으로 ‘국채보상취지서’를 전국에 발송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는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고 일본에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대구광문사와 대구광문회 주도로 1907년 2월 21일 대구군 서문 외 북후정(北堠亭)에서 대구군민대회를 열어 의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처음에는 유생층과 상인층이 주도하였으나 군민대회를 거치면서 점차 부녀자와 하층민들에게 확산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언론을 통하여 전국으로 퍼져갔다. 1908년 6월경까지 1년 4개 월여 진행되면서 약 26만원의 국채보상기금을 모금하였으나, 일제는 배설(裵說, Ernest Thomas Bethell)·양기탁 등 지도적 인사에 대해 탄압을 가하고 기금을 가로챘다.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전 국민이 참여한 유례가 없는 경제적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
| 참고 문헌 |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9일, 「義金傳送」. 『황성신문』, 1907년 3월 29일, 「報債發起人 及 趣旨 一束(續)」. (사)거리문화시민연대,『대구新택리지』, 북랜드, 2007, 380∼38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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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군 서문 외 |
|---|---|
| 주소 | 대구 중구 태평로2가 1-1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 141 |
| 위치 고증 | 『대한매일신보』1907년 3월 9일자와『황성신문』1907년 3월 29일자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장이었던 태평로 2가 대구시민회관에 <국채보상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














북후정 터(「1:10,000(昭和12年修正測圖)」, 1937,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국채보상운동 관련기사(『황성신문』, 1907년 3월 29일)
국채보상운동 관련기사(『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9일)
북후정 터 후면
북후정 터 전경
북후정 터 좌측
국채보상운동 군민대회 개최지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