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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태연집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해외독립운동가 구내사적지, 사회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집은 없어지고,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정의 3·1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펼친 김태연이 태어나 살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조선공산 재건##조공
관련 조직 신흥청년당/화요회/조선공산당 
관련 인물 김태연(金泰淵)
관련 내용 김태연(金泰淵, 1899~1938)은 김계(金桂)·김추성(金秋星)·김단야(金丹冶)로 불렸다. 1919년 3월 24일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에서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태형 90도를 받았다. 그해 12월 상해로 망명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청년회에서 간부로 일했다.

1922년 1월 극동민족대표대회에 참가하고, 그해 4월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국내로 옮기기 위해 입국하다 신의주에서 붙잡혀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월 출옥 후 신흥청년동맹·화요회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12월 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여 1926년 1월부터 조선공산당 기관지『불꽃』주필로 활약하였다. 그해 융희황제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안동현에서 권오설을 만나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1929년 11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도하였으며, 1934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조선민족부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정권으로부터 일본제국주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김태연 등 판결문」, 1919년 4월 1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206쪽.
총독부 경무국,『용의조선인명부』, 국사편찬위원회, 1934, 54쪽.
김도형,「국제공산주의자 김단야의 삶」,『역사비평』25, 역사비평사, 1993, 227쪽.
강만길·성대경 편저,『한국사회주의 인명사전』, 창작과 비평사, 1996, 5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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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북도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69
주소 경북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68
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길 155-33
위치 고증 「용의조선인명부」와「김태연 등 판결문」에 주소지가 기재되어 있다. 김천시 개령면사무소에 확인한 결과 김태연이 살았던 동부동 69번지 지적은 말소되었으며, 그 집터는 동부리 68번지 창고부지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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