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조선방직주식회사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
| 상태 | 멸실 / 현재는 각종 현대식 건축물들이 신축되어 번화가로 변해있다. 당시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 정의 | 1920∼30년대 부산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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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조선방직주식회사(朝鮮紡織株式會社)는 일제가 우리나라 목화의 재배와 매매 및 면사방직과 판매에 대한 영리를 목적으로 1917년 11월 범일동 일대에 조선방직공장을 세웠다. 대지 8만평 위에 세워진 이 공장은 일제가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공장으로 식민지 노동약탈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면화를 싼값에 사다가 거대한 방직공장을 세워 면사로 가공하여 다시 우리나라 공장에 비싼 값으로 되팔아 많은 이윤을 남기는 등 이중의 착취를 자행하였다. 조선방직공장은 부산 최대의 공장답게 직공수가 많았으나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노동쟁의도 자주 발생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930년 1월 9일 불경기에 생활이 어려워진 직공 3천여명이 임금 30전을 80전으로 인상할 것,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작업중 부상자 치료비 부담 등을 요구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단행한 파업하였다. 이 파업은 일제의 노동수탈에 항거한 한국인들의 노동쟁의로 유명하였다. 당시의 노동쟁의는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반제운동으로 발전시키기도 하여, 다른 공장에도 영향을 주어 영도의 조선노조를 비롯하여 각 정미공장, 범일동의 태화고무공장, 삼화고무공장 등 각 고무공장에도 파급되었다. 또한 1933년과 1936년에도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잇따라 일어나 일제의 노동수탈 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해방 후 조선방직은 부산 최대의 적산으로 국내 최대의 면방직회사로 남아 있었다. 1954년 국무회의에서 조선방직의 불하가 결정되고, 1955년 2월 대구공장을 분리하는 동시에 부산공장을 강일매에게 임대하였다가 8월에 불하하였다. 이후 영업주의 잦은 교체와 시설의 노후화 등으로 결국 1968년 4월 부산시로 넘어가고 동년 5월 범일지구 재개발사업을 하면서 주변무허가 건물이 철거되면서 사라졌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폐쇄지적도」. 武田信義,「부산부시가도」, 1936. 中村資良,『(大正 12年) 朝鮮銀行會社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23, 61쪽. 『동아일보』, 1930년 1월 17일, 「朝紡罷業을 再論함」. 『동아일보』, 1933년 5월 7일, 「부산 조선방직회사 천여명 직공이 동요」. 『조선일보』, 1936년 6월 30일, 「조선방직 직공 이천여명이 동요」. 홍순권,『일제시기 재부산일본인사회 사회단체조사보고』, 선인, 2005, 270∼27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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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부산부 범일동 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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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부산 동구 범일동 70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1930년 1월 17일자와 1933년 5월 7일자, 『조선일보』1936년 6월 30일자 기사 등을 통해 관련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정 12년)조선은행회사요록』을 통해 당시 주소지를, 「부산부시가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일제시기 조선방직회사(「부산부시가도」, 1936)
조선방직주식회사 터 전경
조선방직주식회사 터 전경
조선방직주식회사 터 전경
조선방직주식회사 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