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진주 객사 앞 국채보상운동 집회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애국계몽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멸실 / 최근 아파트가 건축되었다. |
| 정의 | 1907년 3월 진주 지역 국채보상운동 관련 단체가 집회를 개최하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7 진주 객사 앞 국채보상운동 집회 개최 |
|---|---|
| 관련 조직 | 경남애국회/경남애국채상소/국채보상경남회 |
| 관련 인물 | 안택중(安宅重)/안효정(安孝政)/안택중(安宅重)/김기대(金基大)/매옥(梅玉)/금련(錦蓮)/부용(芙蓉)/강주식(姜周湜)/안헌(安憲)/강경호(姜璟鎬) |
| 관련 내용 |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모은 기금으로 일본에 대한 국채를 갚아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국권회복운동이었다. 진주에서도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호응의 열기는 뜨거웠다. 안택중·안효정·김기대 등 20명에 의해 발기된 애국경남회(慶南愛國會)에서는 경남애국상채소(慶南愛國償債所)를 진주 낙육학교(樂育學校) 사무실에 두고 3월 13일과 19일 각각 진주군 단위와 경상남도 단위의 모금행사를 열었으며, 그 수익금은 국채보상을 위해 진주농공은행에 저축하였다. 진주 객사 의봉루(儀鳳樓) 앞에서도 관련 단체들의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객사 앞에서의 연설회는 남녀가 구름같이 모여 아홉 번 탄식하고 열번 눈물 흘렸다고 할 만큼 민중들의 호응이 대단하였다. 매옥·금련·부용 등 기생들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강주식·안헌·강경호 등도 국채보상경남회(國債報償慶南會)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객사 앞 연설회 중 진주의 유력자 강주식이 수익금을 자신들 측에 합쳐서 내자고 한 제안에 대해 부용이 보국의 마음은 각자 개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며 거절하고 그를 성토한 일은 진주에서의 국채보상운동의 자발성과 열기를 반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진주 객사는 고려 말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건축물로써, 진주재판소로 사용된 것은 1908년 10월 부터이다. 이후 1909년 11월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로 개칭되었고, 1910년에는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 진주구재판소로, 1912년에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1937년 객사 건물을 허물고 2층 벽돌건물의 법원청사를 신축하였다. |
| 참고 문헌 |
「朝鮮五万分一地形圖; 晋州」, 조선총독부, 1918. 『황성신문』, 1907년 3월 19일,「鶯聲討鴉」. 『황성신문』, 1907년 3월 20일,「慶南愛國」. 『황성신문』, 1907년 3월 29일,「報債發起人 及 趣旨 一束(晋州郡)」.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8일,「국채보상경남회 취지서」. 伊作友八,『晋州案內』, 晋州郡 晋州面 飛鳳洞, 1914, 45~46쪽. 勝田伊助,『晋州大觀』, 晋州大觀社, 1940, 20ㆍ20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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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진주군 대안면 평안동 |
|---|---|
| 주소 | 경남 진주시 평안동 47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진주시 향교로 3 |
| 위치 고증 | 「황성신문」1907년 3월 19일자, 3월 20일, 3월 29일자 등의 기사에서 진주 객사 의봉루 앞에서 국채보상운동 관련 집회가 개최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진주시 평안동 47번지 롯데인벤스 앞에는 진주 객사 터임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들이 발굴된 상태로 노출, 전시되어 있다. |














국채보상경남회 취지서(『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8일)
진주객사 터에 자리잡은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1:10,000 (昭和8年修正測圖)」, 1933,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진주장날의 전경과 가운데 진주지청의 모습(1913)
진주객사(1910)
진주객사 앞 국채보상운동 집회지 전경
진주객사 앞 국채보상운동 집회지에서 진주진위대 방향을 바라본 모습
진주객사 앞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