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기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생가 터에 가옥을 복원하였고, 생가 입구에 기념표석과 '의사해학이기선생기념비'가 있다. |
| 정의 | 1907년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던 항일운동가 이기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7.3 을사오적 암살사건 |
|---|---|
| 관련 조직 | 대한자강회/자신계/호남학회 |
| 관련 인물 | 김개남(金開南)/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나인영(羅寅永) |
| 관련 내용 |
이기(李沂, 1848~1909)는 전라북도 김제군 성덕면에서 태어났다. 호는 해학(海鶴), 자는 백증(伯曾)이다. 실학을 연구하였고 유형원(柳馨遠)·정약용(丁若鏞) 등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려다 김개남(金開南)의 반대로 구례 자택으로 돌아왔다. 1899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할 때 양지위원으로 아산의 토지를 측량하였다. 1905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천황과 일본 정부 요인에게 한국침략을 규탄하는 서면을 제출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되자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1906년 3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3월 나인영(羅寅永) 등과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1907년 7월 평리원에서 7년의 유배형을 언도받고 진도로 귀양갔다. 석방 후 서울로 돌아와 호남학회를 조직하고 『호남학보(湖南學報)』를 발행하면서 민중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저서로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이기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나인영 등 31인 판결문」, 1907년 7월 3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기, 『해학유서』, 국사편찬위원회, 1955. 김상기, 「이해학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아세아학보 - 하성 이선근박사화갑기념논총』 1, 아세아학술연구회, 1965, 69~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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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김제군 성덕면 대석리 |
|---|---|
| 주소 |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4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나인영 등 31인 판결문」 및 「이기 공적조서」에 관련 사실이, 「이기 공적조서」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생가를 복원하였고 기념표석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














이기 생가 전면 우측
이기 생가 좌측면
이기 생가 정면
의사해학이기선생사적비
이기 생가 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