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원주진위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건물 |
| 상태 | 복원 / 2005년 강원감영 복원사업에 의해 대대적으로 복원되었으며, 매년 이곳에서 강원감영제가 열리고 있다. |
| 정의 | 1907년 민긍호의 지휘 아래 의병을 일으킨 원주진위대의 본부가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민긍호(閔肯鎬) |
| 관련 내용 |
1895년 5월 지방제도가 개편되면서 전국 도회처와 요충지에 23개의 관찰부가 설치되었다. 이 때 원주에 있던 강원감영이 폐지되고 대신 동북부는 강릉, 북부는 춘천, 남부는 충주에 관찰부가 설치되었다. 강원감영이 있던 원주는 충주관찰부 소속으로 전락하였다. 옛 강원감영이 있었던 자리는 지방군이 주둔하는 본부로 사용되었다. 원주는 1895년 8월 지방군이 폐지된 후 1897년 6월 다시 지방대가 창설되었고, 1900년 7월 지방 군대의 명칭이 모두 진위대로 통합되면서 원주진위대가 되었다. 진위대는 본래 18개 대대였으나 1905년 4월 원주진위대를 포함한 8개 대대로 감축되었다. 그러다가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군대해산이 시작되면서 원주진위대도 해산되고 만다. 원주진위대는 1905년 원용팔 의병부대와 김하규 의병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초기에는 군인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의병운동의 진압부대로 임무를 수행했지만, 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이들의 상당수가 의병부대로 참가하면서 갈등이 해소될 수 있었고 의병운동의 질을 더욱 향상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 장병들은 해산식을 갖고 원주진위대는 8월 10일에 해산될 예정이었다. 8월 5일 원주진위대 병사들은 특무정교 민긍호의 지휘 하에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확보한 다음 일제히 봉기하였다. 아울러 원주 주민들이 진위대 군사들의 봉기에 합세함으로써 원주지역의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의병항쟁자료집, 1971, 585쪽.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62-78쪽. 오영섭,『화서학파의 사상과 민족운동』, 국학자료원, 1999, 246-257쪽. 오영교, 『강원감영연구』, 원주시, 2007. 원주시, 『原州 丁未義兵 硏究』, 2008. 심철기, 『근대전환기 지역사회와 의병운동 연구』, 선인, 2019. 왕현종,「1907년 이후 원주진위대의 의병참여와 전술변화」,『역사교육』96, 2005. 서태원,「대한제국기 원주진위대 연구」,『호서사학』37, 2005. 심철기, 「강원감영의 이전과 원주의 근대도시 형성과정」, 『강원사학』 29,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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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원주군 본부면 |
|---|---|
| 주소 |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7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1895년 전국을 8도에서 23부로 개편하면서 강원감영의 기능을 상실하고 그 위치에 원주진위대가 설치되었다. 정미의병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윤기영 의병장의 손자인 윤병진의 증언으로 우치를 확정하였다. |














원주진위대 터전경(2021년 촬영)
원주진위대 터 - 포정루(2021년 촬영)
원주진위대 터 - 선화당(2021년 촬영)
원주진위대 터 전경(2021년 촬영)
원주진위대 터 전경(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