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달성공원 - 광복회 결성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기타(공원) |
| 상태 | 변형 / 1914년 조성된 대구신사가 없어지고, 이상화·최제우·허위·이상룡·서병오를 기리는 비석이 들어서는 등 변화를 거쳤다. |
| 정의 | 1915년 8월 25일 박상진 등이 모여 광복회를 결성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풍기광복단/조선국권회복단/광복회/길림광복회 |
| 관련 인물 |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양제안(梁濟安)/최준(崔俊)/이복우(李福雨)/채개중(蔡基中) |
| 관련 내용 |
광복회(光復會)는 풍기에서 결성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가 합류하여 결성하였다. 이들은 1915년 8월 25일(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 모임을 갖고, 단체 이름을 광복회로 정하였다. 책임자로 박상진이, 단원으로 우재룡·권영만·양제안·최준·이복우 등으로 구성되었다. 본부에 사령관(司令官)·지휘장(指揮長)·재무·행형(行刑) 등의 부서를 두었다. 이 외에도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 국내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만주에 길림광복회(吉林光復會)를 설치하였다. 광복회는 독립전쟁을 추구하며, 만주 독립군기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자금·인력 등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918년 1월 박용하(朴容夏) 처단을 계기로 광복회원들이 일본 경찰에 붙잡히면서 박상진과 채기중 등 단원들 거의가 체포되었다. 박상진과 채기중은 1921년 8월 사형 순국하였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 「광복회 조직」.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대구지적도」, 1927(대구향토역사관 소장). 김희곤, 『박상진자료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345·356·3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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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 |
|---|---|
| 주소 |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 |
| 위치 고증 | 『박상진자료집』과『독립운동사』7권, 『동아일보』1945년 12월 27일자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927년에 발행된 「대구지적도」를 통해 달성공원 위치를 확인하였다. |














1910년대 달성공원
1910년대 달성공원
달성공원 내부
달성공원 정문에서 시내 방향
달성공원 원경
달성공원 내부
달성공원 입구
1920년대 달성공원 입구의 팔천대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