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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영흥학교 터 3·1운동 만세시위지/학생운동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학생운동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영흥학교의 후신인 영흥고등학교는 목포시 상동으로 이전해갔고 건물은 없어 졌으며, 그 터에는 현재 유달파크맨션이 들어서 있다.
정의 1921년 워싱턴군축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조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기 위해 영흥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만드는 등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만세운동을 하였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학생운동
관련 조직 양동교회/정명여학교 
관련 인물 양일석(梁一錫)/김옥남(金玉南)/박종근(朴鍾根)/김용문(金龍文)
관련 내용 1919년 목포 만세운동은 양동교회 교인들과 정명여학교·영흥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4월 8일 영흥학교 학생 김옥남이 친 비상 종소리를 신호로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 200여 명과 양동교회 교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학교 정문을 나와 프렌치병원(현 양동제일교회 자리) 앞을 지나 동화고무공장을 거치면서 시민들을 동원하였다. 이날 시위에서 2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학교는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1921년 11월 영흥학교 보통과 졸업생 양일석은 워싱턴 군비감축회의 소식을 듣고 모교인 영흥학교로 갔다. 그리고 재학생 김옥남·박종근·김용문 등에게 회의에서 한국독립문제가 거론될 것이라며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기숙사 안에서 태극기를 수십 매 만들어 이튿날인 15일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영흥학교는 1902년 미국 남장로파 선교회가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임성옥·유래춘 등의 발기로 양동 유래춘의 집에 개설한 영흥서당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수용인원은 10명 정도였다. 1905년 영흥서당을 영흥소학교로 고치고,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09년 10월 10일 석조건물로 새 교사를 건립하였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3-학생독립운동사자료집, 1977, 926-929쪽.
목포시,『목포시사(인문편)』, 목포시청, 1987, 623-624쪽.
「양일석 등 판결문」, 1922년 3월 11일, 국가부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찬승,「무안감리서와 개화자강운동」,『목포개항백년사』, 목포백년회, 1997, 154쪽.
송현강, 「한말·일제강점기 목포 영흥·정명학교의 설립과 발전」, 『역사학연구』35, 호남사학회, 2009, 124~127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목포부 양동
주소 전남 목포시 양동 120
도로명 주소 전라남도 목포시 만세로 19
위치 고증 『목포시사』·『목포개항백년사』·『정명100년사』등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으며, 현재 유달파크맨션이 당시 영흥학교 위치였음을 정명여자고등학교에서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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