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용궁공립보통학교 터 3·1운동 만세의거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용궁공립보통학교 건물은 없어지고, 현재 그 자리에는 용궁중학교가 있다. |
| 정의 | 1919년 4월 11일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정진완/김칠종/김국경/정규원/임우경/이구성 |
| 관련 내용 |
예천군 용궁면의 만세시위는 용궁공립보통학교 4학년 학생인 정진완(鄭鎭琬)에 의해 기획되었다. 그는 1919년 4월 8일과 11일에 학교 기숙사에서 졸업생인 김칠종(金七鍾)과 4학년 학생인 이구성(李九成)의 동의를 끌어내고 만세시위의 날을 정하였다. 이들은 4월 12일 오전 9시경 용궁공립보통학교에 모여 장터로 나가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각자 군중들을 모으기 위해 역할을 분담했다. 정진완은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이구성은 용궁면내 주민들을, 김칠종은 용궁면 밖의 주민들을 모으기로 하였다. 그리고 11일 밤, 기숙사에서 종이태극기 22개를 만들었다. 그러나 시위전날 한 학부형의 밀고를 받은 교장이 일본헌병대에 이 사실을 알리는 바람에 시위계획이 탄로나고 말았다. 신고를 받은 예천헌병분대는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17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체포된 정진완·김칠종·김국경(金國經)·임우경(林遇慶)·정규원(丁奎源) 등은 실형을 언도받았다. |
| 참고 문헌 |
「정진완 등 6인 판결문」, 1919년 4월 2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정진완 등 3인 판결문」, 1919년 6월 1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선총독부,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1914-1918)』.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38쪽. 김일수, 「일제강점기 경북 예천지역의 민족운동」, 『계명사학』 8, 계명사학회, 1997, 313쪽. 예천군지편찬위원회, 『예천군지』 상, 2005, 228~229쪽. 김시우, 『예천의 독립운동사』, 예천문화원, 2010, 183~186쪽. 김진호 등, 『국내3.1운동 Ⅱ-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15~31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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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
|---|---|
| 주소 |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251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1길 33 |
| 위치 고증 | 「정진완 등 6인 판결문」과 『고등경찰요사』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용궁초등학교 연혁지」와 교사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현 용궁중학교 자리가 당시 위치임을 확인하였다. |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경찰부, 1934)
용궁공립보통학교(「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 예천」, 1914-1918)
용궁공립보통학교 터 후면
용궁공립보통학교 전경(현 용궁중학교)
용궁공립보통학교 터 좌측
용궁공립보통학교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