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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부평리 3·1운동 만세시위 모의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기타
상태 변형 / 969년에 창건된 봉선사는 6·25전쟁 때 전소되었다가 이후 1977년 중건을 마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의 1919년 3월 29일 김성숙 등 봉선사 승려들이 부평리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조선독립단/의열단/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인물 김성숙(金星淑)/강완주(姜完珠)/김석로(金錫魯)/이순재(李淳載)
관련 내용 김성숙(1898~1969)은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봉선사의 승려로 있었다. 만세시위 소식을 들은 김성숙은 1919년 3월 29일 봉선사 승려인 이순재(李淳載)·김석로(金錫魯)·강완주(姜完珠) 등과 함께 진접면 부평리 인근의 동리 주민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시위의 전개와 방침을 알리는 문건을 비밀리에 제작· 배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이들은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임시사무소(臨時事務所)라는 명의로 동료들과 함께 격문을 만들었다. 이 격문의 취지는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으므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그들은 약 200매 정도를 작성하여 인근 동리에 배포하였다. 봉선사 승려들의 만세시위를 선도하는 이러한 움직임는 이후 3월 31일 부평리 만세시위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독립문서의 배포 사건으로 김성숙은 동료 승려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성숙은 출옥한 후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 갔으나, 곧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3년에는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의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간 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으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혁신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4월 12일 사망하였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이순재 등 4인 판결문」, 1919년 9월 1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Ⅰ, 原書房, 1967, 468·472·55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1, 14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302~303쪽.
이정식,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1988, 46~49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447~448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255
주소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
도로명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봉선사길 32
위치 고증 『독립운동사』 2권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봉선사 소속 인사들의 증언으로 김성숙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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