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상설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1988년 새롭게 복원 정비되었다. 생가 안에는 사당과 동상, 숭모비 초혼묘 등이 조성되어 있다. 2021년 현재 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
| 정의 | 서전서숙을 건립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서고, 1907년 헤이그특사로 파견되어 해외에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상설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헤이그특사사건 |
|---|---|
| 관련 조직 | 대한협동회/서전서숙/대한광복군정보/신한혁명단 |
| 관련 인물 |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
| 관련 내용 |
이상설(1870~1917)은 1870년 지금의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에서 이행우(李行雨)와 벽진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로, 그가 태어난 마을은 경주이씨 산지기가 산다고 해서 산직말로 불렸다. 1876년 7살 때 이용우(李龍雨)의 양아들이 되어 상경하였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고, 특히 외국어와 산술에 능통하였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랐다. 상하이를 거쳐 북간도 용정에 정착한 그는 서전서숙을 건립하는 등 항일민족교육에 힘을 쏟았다.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1859~1907), 이위종(1907~?)과 함께 참석하여 일제침략의 부당성과 잔혹상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려했으나 실패했다.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했다. 이상설은 귀국하지 않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지를 순회하면서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이 되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여 한흥동(韓興洞)에 한인마을을 건설하고 민족교육을 시켰다. 1914년 연해주 한인 이주 50주년을 기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1915년에는 신한혁명단을 조직, 광무황제의 중국 망명을 추진하고 독일과 손잡고 일본과 싸울 것을 계획하던 중 탄로나 실패했다. 1917년(47세)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 병사하였다.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이융조·김경표, 「이상설 생가의 복원에 관한 고찰」, 『호서문화연구』9,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 1990, 39∼72쪽. 진천군지편찬위원회,『진천군지』, 진천군, 1994, 1318·1345쪽. 상산고적회,「이상설 행장」,『상산문화』5, 1999, 113쪽. 광복회 충청북도지부,『충청북도 독립유공자공훈록』, 2001, 49·324쪽. 한글학회,『한국지명총람』3, 1970, 471쪽. 박걸순, 『충북의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 국학자료원, 2012, 35쪽. 박경목, 「충북지역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 사적지의 보존과 활용」,『중원문화연구』20, 2013, 8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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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덕문면 산척리 |
|---|---|
|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 (이상설안길 1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상설 생가의 복원에 대한 고찰」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생가는 40여년 전에 무너졌으나 1988년 복원되었고 사당, 동상 초혼묘 등이 추가로 조성되었다. |














헤이그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상설
이상설 동상
숭렬사
복원된 이상설 생가
복원된 이상설 생가 입구
복원된 이상설 생가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