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옥구소작쟁의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이엽사농장 사무실은 임피중학교 정문 안쪽에 있었으며 사무실 앞 시위장소에는 현재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 정의 | 1927년 이엽사 농장의 횡포에 대항하여 서수면 농민들이 소작쟁의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7 옥구소작쟁의(沃溝小作爭議) |
|---|---|
| 관련 조직 | 서수농민조합(瑞穗農民組合) |
| 관련 인물 | 장태성/박상호/김병로/이인/한상억/이창휘/김용무 |
| 관련 내용 |
이곳은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의 횡포에 맞서 서수지역 소작인 500여 명이 심야시위를 벌인 곳이다. 이엽사 농장은 삼례·서수·황등에 걸쳐 1,000 정보의 논과 200 정보의 밭, 그리고 1,700여 명의 소작인을 두고 한 해에 12,000석을 거두는 대농장이었다. 옥구소작쟁의는 1927년 8월에서 11월에 이르기까지 총 7차에 걸쳐 전개되었다. 먼저 8월 9일 서수청년회에서 주최한 강연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사 3명을 연행하자 농민 수백 명이 주재소를 포위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어 11월 15일에는 조합원 수백 명이 이엽사농장 앞으로 시위를 하며 행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엽사농장에서 소작료를 75%로 올리자 서수농민조합(瑞穗農民組合) 소작인 대표 등이 모여 24일 소작료를 불납할 것을 결의하였다. 25일 밤 일경은 조합장 장공욱(일명 張台成)을 역전 주재소로 압송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농민들은 즉시 징을 쳐 500명을 집결하게 하고 임피역전주재소 앞에 가서 장공욱의 무죄석방을 요구하였다. 일경이 이에 불응하자 임피역전주재소에 돌을 던져 입구의 채양 지주 3개를 파손시키고 순사를 난타하여 포박하고 장공욱을 업고 나왔다. 이후 서수주재소에 조합간부 박상호가 검거되었다는 소식에 다시 서수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였다. 이 사건으로 80여 명이 군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34명이 소요 및 구금자 탈취라는 죄명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 김병로(金炳魯)·이인(李仁)·한상억(韓相億)·이창휘(李昌輝)·김용무(金用茂) 등 5명의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맡았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7년 11월 29일, 「옥구에 폭발된 소작쟁의 전말」. 「장태성 등 9인 판결문」, 1928년 5월 2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宇津木初三郞, 『朝鮮の寶庫 全羅北道發展史』, 1928(경인문화사, 1989, 270쪽). 김양규, 『우리 고장의 항일운동사-옥구농민의 항일항쟁사』, 군산문화원, 2001, 238~258쪽. 「장태성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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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옥구군 서수면 서수리 |
|---|---|
| 주소 | 전북 군산시 서수면 서수리 1085-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27년 11월 29일자 보도와 「장태성 등 9인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며, 광복회 지부장 문병준과 전 군산문화원장 김양규의 고증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














옥구소작쟁의 관련 기사(『동아일보』, 1927년 11월 29일)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
이엽사농장 사무실 터
옥구농민항일항쟁기념비 우측(비 뒷편 수풀 있는 곳이 이엽사농장사무실 터)
기념비 뒤 이엽사농장사무실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