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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말죽거리 전투지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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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가수호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초기작전
종류 거리/산야
상태 변형 / 시가지가 정비되면서 완전히 변형되었다.
정의 1950년 7월 1일에서 2일까지 국군 혼성 제2사단 일부 병력이 옥수동과 뚝섬에서 한강을 건너 신사동 방면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3사단과 전투를 벌였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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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1950 말죽거리 전투
관련 조직 국군 혼성제2사단 
관련 인물 김홍일, 임선하, 차갑준, 이한림, 장철부
관련 내용 북한군의 남침 직후 한강이남의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은 북한군의 주공격선이라 예상한 노량진 - 여의도 방어에 역점을 두면서도 한남동 - 신사동의 방어에도 대비하였다. 이는 북한군이 이곳을 지나 과천 - 안양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 한강방어선의 국군 주력이 포위될 것이고, 판교-풍덕천으로 진출해도 국군의 병참선과 투입된 전투부대의 퇴로가 차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홍일 사령관은 혼성 제2사단장 임선하 대령에게 이 일대의 방어임무를 맡기고, 장철부 소령이 이끄는 기갑연대 제2대대(기병수색대대)에게는 신사동 일대를 지키게 하였다.

1950년 7월 1일 오후 북한군이 신사동으로 도하하여 말죽거리의 제5연대를 본격적으로 돌파하려고 하자, 연대장 이하 제2대대장 차갑준 소령 등이 수류탄을 던지며 근접전투로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7월 2일 새벽 연대장이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방어진지가 돌파당하고, 과천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제5연대가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을 당하자, 이한림 사단장은 예비부대로 두었던 보병학교 연대를 옥녀봉(말죽거리 남쪽 5km, 청계산줄기) 북쪽의 193고지 일대로 추진하여 말죽거리 - 판교간 도로를 방어하도록 했다. 마침 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며 보급품을 싣고 판교 방향으로 향하던 북한군의 30여 대 트럭이 193고지 동쪽 지대에 이르자 이들을 급습하여 20여 명을 사살하고 차량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북한군 제 3사단과 계속된 전투 속에서 후방에 국군 혼성 제3사단이 편성·보강되면서 혼성 제2사단은 3사단에게 말죽거리 - 판교 - 수원 간 지연 작전을 넘기고 과천을 지나 군포로 철수하였다.
참고 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1, 2003, 331-332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3, 2006, 197·202-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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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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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소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양재리
주소 서울 강남구 도곡동 959, 서초구 양재동 산 40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한국전쟁사』3권과 임백진(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제3연대 소령)의 증언 등의 전투사에 의하면, 혼성 제2사단 5연대 등이 신사동으로부터 진출한 북한군과 말죽거리 일대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말죽거리 전투지는 현재 양재역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 고지 일대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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