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권동진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나이아가라파크 모텔과 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권동진이 3·1운동 당시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 운동/1926 신간회 민중대회 |
|---|---|
| 관련 조직 | 대한협회/신간회 |
| 관련 인물 | 오세창(吳世昌)/손병희(孫秉熙) |
| 관련 내용 |
권동진(權東鎭, 1861-1947)은 서울에서 성장해 사관학교를 마치고 육군 초관으로 3년간 근무한 뒤, 함안군수를 1년간 역임하였다. 거문도첨사로 있을 때 명성황후시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하여 11년간 도쿄[東京]에 머물렀다. 1906년 귀국한 후에는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에서 사귀었던 손병희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도하여 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구파의 중진으로 신간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사건으로 체포되어 한 차례 더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오세창과 함께 임시정부환영 국민대회를 주도하였고, 신한민족당 당수와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권동진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1, 1990, 40∼50쪽. 「손병희 등 48인 판결문」, 1920년 8월 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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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돈의동 76 |
|---|---|
| 주소 | 서울 종로구 돈의동 76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1919년 4월 8일 경성지방법원의 「권동진 신문조서」 및 「손병희 등 48인 판결문」 등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














권동진 집터 주변
권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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