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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중앙학림 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현재 주택가로 변해(서울과학고 서남쪽 아래편) 종암아마레스빌딩, 진양빌라를 비롯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정의 1915년 11월 개교한 불교계의 고등교육기관으로 3·1운동을 비롯한 불교계 민족운동의 산실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조선불교청년회/불교유신회 
관련 인물 한용운(韓龍雲)/신상완(申尙玩)/오택언(吳澤彦)/김법린(金法麟)/백성욱(白聖郁)/김대용(金大瑢)/김규현(金圭鉉)
관련 내용 중앙학림(中央學林)이 불교계 민족운동의 거점으로 떠오른 것은 3·1운동 전야인 1919년 2월 28일 밤 한용운이 계동 43번지 유심사(唯心寺) 자신의 처소로 신상완·백성욱·김대용·오택언·김법린·김규현 등 중앙학림 학생들을 불러 독립선언서 3천매를 전달하고 시내를 비롯한 각처에 배포할 것을 지시하면서부터였다. 한용운의 지시를 받은 학생들은 인사동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하고, 중앙학림 기숙사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분배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당일 서울시내 각 처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범어사·해인사·통도사·동화사 등으로 내려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특히 신상완·백성욱·김대용·김법린 등 4명은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신상완과 백성욱은 국내특파원으로 5월 중순 다시 귀국하여 불교계를 거점으로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중앙학림 학생들은 1920년 창립된 조선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에 참여하여 불교개혁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중앙학림 자리에는 그 뒤 1928년 4월 불교전수학교가 2층 양옥 벽돌교사를 신축하고 문을 열었다. 불교전수학교는 1930년 4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 1940년 6월 혜화전문학교로 개칭, 1946년 9월 동국대학교가 되었는데, 이 자리는 1947년 9월 동국대학교가 중구 필동3가 26번지로 이전할 때까지 교사로 사용되었다.
참고 문헌 「이계창 등 30인 예심종결결정(경성지방법원)」, 1919년 8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예심조서) 오택언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6, 1993, 115~118쪽.
김법린, 「삼일운동과 불교」, 『신천지』 1권 2호, 1946년 3월, 74~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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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성부 숭일동 2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2-12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김법린의 회고 「삼일운동과 불교」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919년 6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오택언 신문조서」와 「이계창 등 30인 예심종결결정」 등에 중앙학림의 주소지가 숭일동 2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중앙학림 터는 과거 명륜당 북묘 자리로서 1915년 11월 개교 당시부터 1922년 4월 전문학교 승격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으로 휴교할 때까지 중앙학림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경성부관내도」(1934)에 중앙학림의 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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