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화수리 마을 탄압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당시 민가는 남아있지 않으며, 새로 지어진 건물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 정의 | 1919년 4월 4일 장안면·우정면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불탄 화수리 마을이다.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송찬호 |
| 관련 내용 |
1919년 4월 1일부터 4월 3일까지 우정면·장안면 지역 봉화시위와 연합만세시위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보복이 곧 시작되었다. 4월 4일 새벽,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有田)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의 수비대 병력이 발안에서 출발하여 화수리를 완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였다. 화수리 여수동·화수동·굴원리 주민들은 일본 경찰의 보복을 예상하고 노인들만 남기고 캄캄한 밤 중에 원안리와 호곡리 바다 쪽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피신했다. 수비대들은 집집마다 방화를 저지르고 주민들에게 폭력을 가하였다. 화수리 구장 송찬호는 72군데나 칼로 난도질을 당하였다. 이때 화수리 마을은 20여 채의 가옥이 불타고 3명의 마을 주민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인해 58개의 마을의 328채의 가옥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또한 47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7명이 다치고, 442명이 피체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잔학성이 세상에 알려지자 국제적인 여론을 불러일으켰으나, 일제는 책임자에 대해 가벼운 처분을 내리고 형식적으로 마무리하는데 그쳤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1, 160~165쪽. 독립기념관, 『3·1운동 관련 일본 육군성 문서 자료집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1, 2020. 화성시사편찬위원회, 『화성시사』 1, 화성시, 2005, 575~580쪽. 화성시·수원대학교 박물관, 『화성지역 3·1운동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 화성시, 2003, 188쪽. 이정은, 「화성군 장안면·우정면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9, 1995. 이용창, 「재판 관련 기록으로 본 화성 장안·우정면 3·1만세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62, 2018.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001(임야원도_0001)」, 1918.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
|---|---|
|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수동길 109-1~133일대(화수리 769~830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大正 9年 檢刑 932號 騷擾 김현묵 외 26명」의 화수리 마을 탄압지 관련 위치도와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2003)의 내용을 통하여 위치를 비정하였다. |














화수리 방화현장
일제 탄압 직후의 화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