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송진우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국내독립운동, 문화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레스빌이라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20년대 초부터 1945년 말 암살당할 때까지 송진우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중앙학교/동아일보사/조선민립대학기성회/한국민주당 |
| 관련 인물 | 기삼연(奇參衍)/김성수(金性洙)/송계백(宋繼白) |
| 관련 내용 |
송진우(宋鎭禹, 1889∼1945)는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한말 의병장 기삼연에게서 한학을 배웠다. 1906년 담양 창평의 영학숙(英學塾)에서 김성수와 함께 신학문을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김성수를 도와 경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학감이 되었다가 1918년 3월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1월 동경유학생 송계백의 방문 이후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 3·1운동의 결실을 맺었다. 3·1운동 후 초기에 거사를 기획한 48인의 한 명으로 지목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개편되면서 김성수의 뒤를 이어 제3대 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발기인과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4년 4월 동아일보사 사장을 사임한 뒤 고문과 주필을 역임하였다. 1926년 3월 국제농민회본부기념사사건 때 주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27년 10월 동아일보사 제6대 사장으로 취임해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과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11월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활동하다가 1945년 12월 30일 암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현대인명사전(2): 東亞日報主筆 宋鎭禹」, 『동광』14, 1927, 17쪽. 『왜정시대인물사료』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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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원동 74 |
|---|---|
| 주소 | 서울 종로구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현대인명사전: 송진우」와『왜정시대인물사료』6 등에 해당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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