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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강릉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상태 변형 / 옛 강릉장터에서부터 현재의 중앙시장까지 상가들이 들어서 있으며,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정의 1919년 4월 2일과 7일 강릉 중앙감리교회 교인과 강릉청년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4.2 강릉공립보통학교 학생 독립만세시위/1919.4.2 강릉군 강릉장터 독립만세시위/1919.4.4 강릉군 남대천 독립만세시위/1919.4.7 강릉군 장릉장터 독립만세시위/1919.4.7 강릉군 화부산 독립만세시위
관련 조직 강릉청년회 
관련 인물 안경록(安慶祿)/이윤식(李允植)/조대현(曺大鉉)/김진숙(金振淑)/최선재(崔善在)/최선근(崔善根)/최돈옥(崔燉玉)/최선호(崔善浩)/정식화(鄭軾和)
관련 내용 강릉의 3.1운동은 4월 2일 강릉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한 계획이 중앙감리교회 목사 안경록(安慶祿) 등 감리교인과 강릉청년회 회원들이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4월 1일 강릉공립보통학교 측 인사들이 사전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4월 2일 오후 4시 강릉 욱정 강릉시장 어시장에서 8~9명이 구한국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시장 상인들에게 태극기를 배부하며 이들이 계속 만세를 부르자, 시장 군중 약 50명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일체 경찰들이 출동해 주도 인사 5명을 체포하였고,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중앙감리교회와 강릉청년회 인사들은 4월 7일에 재차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4일 남대천에서 농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4월 7일 강릉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4월 6일 경찰이 태극기를 보관하고 있던 이윤식(李允植) 집과 감리교회를 습격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조대현(曺大鉉)·김진숙(金振淑)·최선재(崔善在)·최선근(崔善根)·최돈옥(崔燉玉)·최선호(崔善浩)·정식화(鄭軾和) 등은 장터의 최선근 상점에 모여 다시 시위 계획을 추진, 4월 7일 12시경까지 100여 장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가지고 강릉장터로 나가서 군중들에게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들은 장터에서 강릉경찰서로 향하다가 저지되었다. 그러나 일부 청년들은 오후 3시경에 화부산 언덕과 남산에 올라가 계속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 7일에는 강릉경찰서 일경들이 강릉시장에서 개시(開市)를 제지하여 읍민 5~60명이 성 밖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3시경에는 읍내의 고지(高地) 2곳에서 약 200먕의 군중들이 집합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참고 문헌 朝鮮總督府, 『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 1918.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7보)」, 1919년 4월 4일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42보)」, 1919년 4월 9일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7)』,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1, 627~630쪽.
광복회 강원도지부, 『강원도항일독립운동사』 Ⅲ, 1992, 384~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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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강원도 강릉군 강릉면 욱정
주소 강원도 강릉시 금성로 62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37보, 제42보)」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1 : 50,000 지도를 통해 당시 장터의 위치와 주요 도로를 확인하였다. 강릉시장은 1933년 측도본 1:10,000 강릉지형도에서는 성남동 100번지 일대였으며, 현재의 중앙시장은 광복 이후 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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