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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광주작은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거리
상태 멸실 / 당시 장터는 사라지고 현재 서남대학 부속병원을 비롯한 건물들이 들어 서 있다.
정의 1919년 3월 10일에서 13일까지 광주군 광주면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관련 인물
관련 내용 광주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8일 큰장날을 기하여 전개할 계획이었으나 준비와 연락관계로 3월 10일 작은 장날로 연기되었다. 3월 10일 오후 2시경 부동교 아래 작은장터에는 약 1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양림리 쪽에서는 예수교인과 숭일학교·수피아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시민들은 서문통(현 광주우체국 앞길에서 황금동 가는 길)으로,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현 우체국 옆 충장로 2가에서 충장로파출소까지)을 거쳐 모여들었다. 시위군중들이 모여들자 숭일학교·수피아학교 학생들은 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군중들을 이끌었다. 시위행렬은 서문통을 지나 현 광주우체국 앞을 돌아 광주지방법원(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3가 1-11)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위행렬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무장 기마헌병대가 출동하여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만세시위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11일 오후 5시경 숭일학교와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 선두가 되어 300여 명의 시위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돌았다. 13일에는 약 1천명의 시위군중들이 시위를 계속하였다. 11일 23명, 13일 20명이 체포당하였다.
작은장은 지금의 부동교 일대에 섰으며, 장날은 5일과 10일이었다. 장날이 양력으로 바뀐 것은 1937년부터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강변의 넓은 저습지였던 사동 아래를 매립하고 이곳을 새로운 장터로 삼았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참고 문헌 「황상호 등 3인 판결문」, 1919년 5월 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복현 등 16인 판결문」, 1919년 9월 1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556~557쪽.
광주시, 『광주시사』, 1966, 185쪽.
박선홍, 『광주 1백년』 1, 금호문화, 1994, 173~179·268~269쪽.
『광주드림』, 2008년 2월 13일, 「광주갈피갈피-원래 그 자리엔 뭔가 있었다」.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부동정
주소 광주 동구 불로동 174
도로명 주소 광주광역시 동구 천변우로 415
위치 고증 「황상호 등 3인 판결문」·「김복현 등 16인 판결문」 및 『광주시사』·『독립운동사』 3권 등에 관련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광주 1백년』 1권과『 광주드림』 2008년 2월 13일자 기사 및 표지석에서 현재 불로동 서남대학 부속병원 앞쪽이 당시 작은장터였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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