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영광읍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변형 / 영광읍의 중심지로 현재도 시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각종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10일과 15일 영광군 영광면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조철현(曺喆鉉)/유일(柳一)/정인영(鄭仁英)/이병영(李炳英)/박태엽(朴泰燁)/이좌근(李佐根)/조병현(曺炳鉉)/조맹환(曺孟煥)/노준(魯駿)/김은환(金煥)/조희방(曺喜芳)/박병문(朴炳文)/박정순(朴正淳)/박정환(朴靖煥)/조석현(曺石鉉)/유봉기(柳奉基)/조술현(曺述鉉)/김준헌(金俊獻)/정헌모(鄭憲模)/허봉(許奉) |
| 관련 내용 |
1919년 서울에 유학 중이던 조철현(曺喆鉉)·유일(柳逸) 등은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5일 고향 영광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읍내 노동조합장 정인영(鄭仁英)과 영광보통학교 교사 이병영(李秉英)·박태엽(朴泰燁) 등을 만나 서울에서의 3·1만세시위운동 소식을 전하고 영광읍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한편 고종의 장례에 참여차 서울에 갔던 읍내 유지 이좌근(李佐根)은 조병현(曺炳鉉)·조맹환(曺孟煥)·노준(魯駿) 등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면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서로의 계획을 알게 된 이들은 3월 10일 영광읍 장날에 연대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3월 10일 정오경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유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철현이 연설한 후, 정인영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많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어 3월 15일 정인영·김은환(金溵煥)·조희방(曺喜芳)·조병현·박병문(朴炳文)·박정순(朴正淳) 등이 영광면 남천리 박정환(朴靖煥)의 직포공장에서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날 오후 1시 이들은 준비한 태극기 수십 개를 공장 앞에서 수백 명의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출동한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시위대는 강제 해산 당했으며, 그 자리에서 조석현(曺石鉉)·조희방·유봉기(柳奉基)·조술현(曺述鉉)·김준헌(金俊獻)·정헌모(鄭憲模)·허봉(許奉) 등이 체포되었다. |
| 참고 문헌 |
「김은환 등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년 8월 7일. 「이병영 판결문」, 고등법원, 1919년 8월 28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하), 1971, 601~602쪽. 영광군지편찬위원회, 『영광군지』, 영광군, 1994, 232쪽.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 8, 전라남도, 1993, 113~114쪽.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운동』 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2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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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면 남천리 |
|---|---|
| 주소 | 전남 영광군 영광읍 남천리 251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은환 등 판결문」·「이병영 판결문」 등에서 1919년 3월 10일 및 15일 영광읍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된 사실을 확인하였고, 한국근대지리정보(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통해 당시 시장이 위치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














영광읍장터 원경
영광읍장터(2023년 촬영)
영광읍장터(2023년 촬영)
영광읍장터 전경(2023년 촬영)
영광읍장터 전경(2023년 촬영)
이병영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년 8월 28일)
독립운동에 관한 건(「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1919년 3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