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창원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시장) |
| 상태 | 변형 / 창원장터는 현재까지 존속해 장날이면 여전히 많은 노점상으로 붐비고 있으나, 2001년 북동공설시장 개장 이후 현대식 시설물과 상설 상점, 편의시설 등이 들어서면서 모습은 크게 변하였다. |
| 정의 | 1919년 3월 23일과 4월 2일 창원군 주민들이 장날을 이용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23 창원군 창원장터 독립만세시위/1919.4.2 청원군 창원장터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감태순(甘泰舜)/박화열(朴和烈)/설관수(薛灌洙)/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윤호(曺潤鎬)/조희순(曺喜舜) |
| 관련 내용 |
서울의 3·1운동에 이어 3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경상남도 각지에서도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창원 장날인 3월 23일을 거사일로 정한 감태순·박화열 등은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 20분경 시장 한 가운데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시장에 모인 6,000~7,000여명의 사람들이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장터와 그 부근을 행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종이 깃발을 흔들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고조되자 헌병 및 일제 경찰, 주재소원이 진압에 나섰고, 지원 요청을 받은 마산중포병대대와 진해요항부 장교 등 일본군 대병력이 이에 협조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5시 20분경 무력으로 진압되었는데, 이날 3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후 창원지역 청년들은 4월 2일 장날을 재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3시 장터에 사람들이 모이자, 청년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으로 들어갔다. 군중들이 이에 열광적으로 호응하면서 다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는데, 그곳에 주재한 헌병은 지원온 마산헌병분견소 헌병 등과 함께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오후 4시 20분경 시장 상인과 장꾼 등이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6,000~7,000여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자 마산으로부터 지원 병력이 급파되었고, 무력 진압으로 20명의 군중들을 검거하면서 시위대를 겨우 해산시켰다. 창원장터 만세시위로 옥고를 치른 사람은 중동리의 설관수, 북동리의 공도수를 비롯해서 구재균·김호원·조윤호·조희순·감태순·박화열 등이다. 이들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으로부터 각각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마산감옥에 수감되었다. |
| 참고 문헌 |
「감태순 판결문」, 1923년 3월 2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선헌병대사령부,『朝鮮騷擾事件狀況』, 1919, 109쪽. 경상남도경찰부,『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9~10쪽. 이용락,『三·一運動實錄』, 도서출판 금정, 1994, 643~644쪽. 남부희, 일제의 침략과 창원의 3·1운동」, 『창원 600년사』, 창원문화원, 2009, 138~1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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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창원군 부내면 북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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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경남 창원시 의창구 의창구 의창동 249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고등경찰관계적록』및 「감태순 판결문」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邑誌』를 통해 읍성 내에 2, 7일장이 섰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창원공립보통학교 출신 김봉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현 창원초등학교(옛 객사 터) 인근에 있는 북동공설시장 주변이 일제시기 5일장이 서던 장소임을 확인하였다. |














현 창원시 소담동에 세워진 창원읍민만인운동비
창원장터 - 북동공설시장 내부
창원장터(현 북동공설시장)
창원장터 - 북동공설시장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