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구마산 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변형 / 당시 도로는 그대로 있으나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창동거리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
| 정의 | 1919년 3월 구마산장터에 모인 수천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박광연(朴光淵)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마산지역에서는 구마산장터를 중심으로 여러 차례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1919년 3월 21일 장날 3시 30분경 일괄 사직서를 제출한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조선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진압에 동원된 마산중포병대대 대원과 마산헌병분견소 헌병, 그리고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총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분노의 함성과 만세의 물결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이날의 만세 물결은 저녁 무렵까지 이어졌는데, 39명이 검거되면서 해산하였다. 3월 26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는 다시 타올랐다. 오후 2시 40분경 석정통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앞선 만세시위로 부당하게 투옥된 애국지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북마산 도로를 따라 북마산주재소를 거쳐 현재의 오동동 감옥소 쪽으로 진출하였다. 시위가 진행될수록 시위대의 수는 늘어나 3,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시위대의 확산에 다급해진 경찰 당국은 일본 육군중포병대대에 급히 연락하여 병력을 지원받았다. 출동한 일본군은 총검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강제로 체포해 갔다. 3월 31일 장날 오후 4시경에는 구마산에서 3,000여 명에 가까운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감옥소로 진출한 시위대는 감옥소를 둘러싸고 애국지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대의 독립만세 소리가 감옥의 담벽을 넘어 감방 안으로 울려 퍼지자 옥중의 지사들도 감방에서 일어나 창밖을 향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급거 동원된 마산중포병대대 대원과 경찰관들은 시위대의 해산과 진압을 위해 총칼을 휘둘렀다. 이날 시위에는 감옥소 간수인 박광연이 제복을 벗어던지고 시위대 속으로 뛰어들어 많은 시민들을 환호하게 하였다. 이 시위는 오후 6시경 진압되었다. |
| 참고 문헌 |
「마산부 외서면 석정(石町)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2. 朝鮮憲兵隊司令部,『朝鮮騷擾事件狀況』, 1919, 104∼105쪽. 경상남도경찰부,『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8∼9쪽. 朝鮮總督府,『朝鮮の市場』, 1924, 393∼395쪽. 마산시사편찬위원회,『마산시사』, 1985, 104∼107쪽. 허정도,『전통도시의 식민지적 근대화』, 신서원, 2005, 197∼33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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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마산부 석정 |
|---|---|
| 주소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서동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고등경찰관계적록』에 구마산장날에 석정통을 비롯한 구마산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구마산장터의 위치는『조선의 시장』에서 마산부 석정(현 마산시 창동) 등 5개 정(町) 일대의 도로 위에 위치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마산부 석정 일대의 지적원도를 참고하고 1912~1915년 사이 창동 일대의 도로가 정비되었던 사실을 토대로, 현 창동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 도로 위에서 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구마산 장터 주변
구마산 장터(현 창동사거리)
구마산 장터 주변
구마산 장터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