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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묘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운동계열분류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문화운동, 의열투쟁
종류 묘소
상태 원형보존 / 묘를 이장하여 보존하고 있다.
정의 민족주의 역사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한 신채호의 묘소가 있는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23 국민대표회의
관련 조직 대한민국임시정부/제2회 보합단/의열단/재중국ㅈ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정부주의자동방연맹 
관련 인물 윤세복(尹世復)/이승만(李承晩)
관련 내용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단재(丹齋)이다. 1898년 성균관에 입교하였다가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구한말에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였으며, 신민회·기호흥학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독사신론』, 『을지문덕』,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대동사천년사』 등을 저술하여 근대민족사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1910년 국외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민족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에서 청소년들의 국사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조선사』를 저술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 모임에 참가하였으나, 그해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자 임시정부와 결별을 선언하고 반임시정부 노선을 취하였다. 동년 10월 상해에서『신대한』을 간행하여 무장투쟁노선을 지지하는 언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에는 베이징[北京]으로 이동하여 제2회 보합단을 조직하였으며, 1923년에는「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였으며,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등을 집필하였다.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운동에 관심을 갖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4월에는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하고 그 회의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대만의 가오슝[高雄]에서 활동하다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그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한민』, 1936년 3월 15일, 「신채호씨 장서」.
『동아일보』, 1936년 2월 19일, 「단재 신채호 뇌일혈로 의식불명」.
『조선중앙일보』, 1936년 2월 23일, 「위독하던 신채호 21일에 遂永眠, 여순감옥에서 최후를 마친 파란많은 그의 일생」.
『조선중앙일보』, 1936년 2월 25일, 「신단재의 유해 금일 경성을 통과, 一路 청주 선영으로」.
『동아일보』, 1936년 2월 25일, 「30년 만에 故土에 옥사한 신채호 유골 친지의 出迎裏 경성역 통과」.
광복회 충청북도지부, 『충청북도 독립유공자공훈록』, 2001,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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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청주군 산내이상면 귀래리
주소 충북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 305번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신채효의 묘소는 낭성면 귀래리 305번지에 소재한「단재신채호선생유적지」에 있으며 충청북도기념물로서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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