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병천주재소 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당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으며 새로 건축된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19년 4월 1일 천안군 병천리의 만세시위를 탄압한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조병호(趙炳鎬)/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
| 관련 내용 |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장터에서는 3,0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오후 1시경 ‘대한독립’ 깃발을 세우고 태극기를 들고서 조인원(趙仁元)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조병호(趙炳鎬) 등이 주도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아우내 장터에서 30m 정도 떨어진 헌병주재소에서 독립만세 소리를 들은 주재소장 고야마[小山] 등 헌병 5명은 즉시 출동하여 시위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헌병의 발포로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한 뒤 격렬한 항의를 하였으며, 헌병들과 격투하면서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후 천안에서 출동한 헌병과 보병들에 의해 군중들은 강제로 해산당하였다. 이 만세시위로 10여 명이 순국하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사들 가운데 16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
| 참고 문헌 |
「조인원 등 11인 판결문」, 1919년 6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교선 등 5인 판결문」, 1919년 5월 2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 1919년 9월 2일, 「천안시위운동의 후문, 30여 명을 일시에 총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1161~1165쪽. 김진호, 『충남지방 3·1운동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84~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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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 |
|---|---|
| 주소 | 충남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 291-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인원 등 11인 판결문」과 「김교선 등 5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향토사학자 임명순의 고증으로 주재소 터를 확인하였다. |














병천면내 방향으로 본 병천주재소 터
병천주재소 터 전경
병천주재소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