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임실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거리(시장) |
| 상태 | 멸실 / 현재 장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장터의 흔적은 사라지고 민가와 공터가 병존하고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12일 임실군 임실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12 임실군 임실장터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한영태(韓榮泰)/문명근(文明根) |
| 관련 내용 |
임실은 전북 지역에서 천도교의 세력이 가장 강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서울에서 발생한 3·1운동에 관한 소식도 천도교 전주교구를 통해 임실교구장 한영태(韓榮泰)에게 처음으로 전해졌다. 독립선언서와 시위운동에 관한 지침서를 전달받은 한영태는 즉시 교인들을 통해 군내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장터·학교·면사무소 등 요소마다 격문을 붙이도록 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영태와 군청 급사인 문명근(文明根) 등의 주도면밀한 준비에 힘입어 1919년 3월 12일 임실에서는 대규모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날 오전 임실장터 만세시위에는 무려 2,000여 명이 참여하여 대대적인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출동한 헌병과 경찰에 의해 군중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다시 집결하여 1,000여 명에 이르렀고 읍내 뒷산에서도 봉화와 함께 만세 소리가 울렸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한영태는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 자결 순국하였고, 문명근은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다. |
| 참고 문헌 |
「문명근 판결문」, 1919년 5월 16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병헌, 『삼일운동비사』, 시사시보사 출판국, 1959, 90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502~503쪽. 전북지역독립운동추념탑건립추진위원회, 『전북지역독립운동사』, 신아출판사, 1994, 348~349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면 이도리 |
|---|---|
| 주소 | 전북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76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문명근 판결문」 및 『삼일운동비사』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임실장터의 위치는 현지 주민 다수의 증언을 통해 이도리 임실향교 앞 일대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임실향교 앞 옛 임실장터
향교 방면에서 본 옛 임실장터
옛 임실장터 초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