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 지역별
  • 운동별

사적지 찾아보기

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하동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거리
상태 멸실 / 장터와 읍사무소를 연결하는 큰 길은 현재 도로로 이용되고 있으나 당시의 건물이나 장이 섰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정의 1919년 3월 18일과 23일, 4월 7일에 하동군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
관련 조직  
관련 인물 박치화(朴致和)/정섬기(鄭暹基)/정성기(鄭成基)/이경호(李璟鎬)/정이백(鄭伊伯)/박문화(朴汶和)/염삼섭(廉三燮)/정점금(鄭點金)/전석순(全錫舜)
관련 내용 하동군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朴致和, 1880∼미상)는 전국적인 3·1만세시위 소식을 들은 후 1919년 3월 면장직을 사임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1919년 3월 18일 하동읍 장날이 되자 박치화는 태극기를 장대에 달고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서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이에 수많은 군중들이 호응을 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 군중이 1,500여 명으로 늘어나며 만세를 부르자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박치화를 검거하였다. 박치화는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다음 장날인 3월 23일 다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양보면 장암리 일진학교(日進學校) 교원 정섬기는 같은 마을의 정성기와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의논하였다. 또한 고전면 성천리 이경호, 양보면 우복리 정이백 등을 규합하여 3월 23일 하동읍 장날에 수백 명의 군중과 더불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대부분 검거되어 6개월 형을 언도받고 복역했으나 그 가운데 이경호는 복역 중 옥고로 순국하였다.

4월 7일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된 의거가 일어났다.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인 박문화·염삼섭·정점금·전석순 등이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7일 오전 학생 130여 명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면서 학교를 뛰쳐나와 하동읍 시장을 향하여 구보행진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에 앞장 선 박문화는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았다.
참고 문헌 「박치화 판결문」, 1919년 5월 23일, 1919년 7월 3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정섬기 공적조서」,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빅믄화 공적조서」,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경상남도경찰부,『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19∼2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276∼27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972, 1244∼1245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면 읍내동
주소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319, 388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고등경찰관계적록』과「박치화 판결문」, 「정섬기 공적조서」·「박문화 공적조서」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가 연설을 했던 하동장터의 위치는 오대식(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 사무국장)의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삼방로 95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