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장지연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애국계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가옥은 멸실되었고, 신축 건물은 최근까지 경우상호저축은행으로 사용되다가 은행 이전 후 빈 건물로 남아 있다. |
| 정의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제목의 논설을 발표한 장지연이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독립협회 |
| 관련 인물 | 남궁억(南宮檍)/황현(黃玹) |
| 관련 내용 |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경상북도 상주군 내동면 동곽리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장지윤(張志尹)이며, 호는 위암(韋庵)이다. 1898년 4월 남궁억(南宮檍)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민중계몽과 자강정신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독립협회에도 가담하여 독립협회에서 주관한 만민공동회에도 참여했다. 1901년 봄 『황성신문』 주필이 되었으며, 1902년 8월에는 사장이 되어 한말의 언론계를 주도해 나갔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 논설의 게재로 『황성신문』은 정간되고 장지연은 11월 21일 투옥되었다가 64일 만에 석방되었으며,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08년 2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해조신문』의 주필을 맡았다가, 『해조신문』이 폐간되자 같은 해 9월 귀국했다. 1909년 10월 진주에서 창간된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다시 언론계에서 활동하였다. 한일합병으로 한말의 유학자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음독자결하자 장지연은 황현이 죽으면서 쓴 절명시(節命詩) 4수를 『경남일보』 1910년 10월 11일자에 게재했다가, 이 일로 1910년 10월 14일 『경남일보』가 압수, 정간되었다. 1913년 7월경 신병으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맏아들이 살고 있는 마산으로 이주하였다. 1921년 10월 2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 「是日也放聲痛哭」. 『동아일보』, 1921년 11월 4일, 「張志淵氏 長逝」. 『동아일보』, 1923년 11월 11일, 「張志淵氏 추도회」. 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 『마산 창원 역사읽기』, 도서출판 불휘, 2003, 117~122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마산부 수정 61 |
|---|---|
| 주소 |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수성동 61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로 86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21년 11월 4일자에 '마산부 수정 자택에서 사망하였다'라고, 『동아일보』 1923년 11월 11일자에 '마산부 수정 61번지에서 추도식을 거행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토지대장」을 통해 '마산부 수정 61번지'가 장남 장재식(張在軾) 소유의 건물이었음을 확인하였다. |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황성일보』, 1905년 11월 7일)
마산시 현동에 있는 장지연 묘소
장지연 집터
장지연 집터 우측
장지연 집터 좌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