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미두취인소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일제침략·통치·수탈기관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상가 밀집지역으로 변하였다. |
| 정의 | 1896년 5월 설립된 한국 최초의 쌀 거래소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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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1896년 설립된 인천 미두취인소는 쌀의 선물거래, 청산거래를 취급하는 회사로 일제가 한반도 내 미곡시장 장악을 위하여 진출한 대표적인 수탈기관이다. 인천 미두취인소는 1896년 일본인 미곡상들이 일본영사관 및 일본인 상업회의소의 지원을 받아 설립인가 신청을 해 4월 설립인가가 나면서 5월부터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운영부진으로 1898년 10월 해산했다가 1899년 6월 재설립인가를 받아 영업을 재개하였다. 거래는 3기로 구분하여 1개월 내 거래된 매도·매수 물량을 거래 당사자 간에 정리하는 방식으로 취인소에 등록한 중개소를 통하여 거래토록 하였다. 이러한 미두취인소는 유일하게 인천에서만 설립·운영되었고, 투기적 성격이 강해 당시 미곡거래에 참여한 조선인 대부분은 가산을 탕진하고 일부 성공한 경우에도 궁극에는 몰락한 뒤 미두장을 떠났다고 한다. 특히 표면적으로는 미곡의 표준가격 및 품질 확립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오사카 기미시장의 투기거래에서 파산한 일본상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고, 거래소의 투기방식에 익숙하지 못한 조선인들을 유인해 토착자본을 흡수하고 장악하는 것이었다. 미두취인소의 고객 90%가 조선인이었으며 미두장에 바친 돈이 줄잡아 15년 내 수억 원이라 하여 당시 이로 인한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 취인소 등록이 쇄도하기에 이르렀다. 1932년 1월 인천 미두취인소와 (주식회사)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통합되어 조선취인소가 설립되면서 조선취인소 인천지점으로 개편되었다. |
| 참고 문헌 |
中村資良, 『조선은행회사요록』, 동아경제시보사, 1921, 159~160쪽. 中村資良,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 동아경제시보사, 1933, 363~364쪽. 秋山滿夫, 『인천미두취인소연혁』, 인천미두취인소, 1922, 1~12쪽. 『한국최초 인천최초』,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5, 79쪽. 『인천문화유적분포지도』, 인천광역시·인하대학교박물관, 2005, 116쪽. 김도형, 「갑오이후 인천에서의 미곡유통구조 : 인천미두취인소의 설립을 중심으로」, 『택와(擇窩) 허선도(許善道)선생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682~716쪽. 『擇窩許善道선생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이형진, 「일제하 투기와 수탈의 현장-미두·증권시장」, 『역사비평』 18, 역사비평사, 1992, 95~100쪽. 『朝鮮總督府官報』, 1936년 3월 7일, 「日本의 株式會社 18銀行의 京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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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인천부 해안정 3정목 1 |
|---|---|
| 주소 | 인천 중구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 17-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선은행회사요록』(1921년판)에 인천미두취인소가 인천부 해안정 3정목 1번지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인천문화유적분포지도』를 통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미두취인소 터(2023)
미두취인소 터(2023)
미두취인소 터(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