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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형평사 총본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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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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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는 백정들의 인권해방운동 단체이다. 1923년 4월 25일, 백정 출신 장지필, 이학찬 등이 사회운동가 신현수, 강상호, 천석구 등과 진주청년회관에서 발기회를 개최하면서 형평사가 탄생하였다. 같은 해 5월 13일 진주에서 개최된 형평사 창립 축하식은 당시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천대받는 백정들을 해방시키자는 운동이 진주 최대의 공공장소에서 벌어졌다는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형평사가 전국 규모의 사회운동 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인권 해방과 권익 옹호, 공평한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백정의 호적 기록을 삭제하는 활동 등을 펼쳐 창립 1년 만에 지사 11개소와 분사 67개소를 갖춘 대규모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형평사가 전국 단체로 발전하면서 지도부 중심 세력에 변화가 생겼는데, 창립 1년 뒤부터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로 나뉘었다. 결국 1924년 3월 천안에서 열린 조선형평사 혁신대회에서 형평운동의 혁신과 본부의 서울 이전 등을 결정하였다. 다음 달 서울 도렴동 144번지에 조선형평사 본부를 설치하였고, 1926년에 운니동 23번지로 본부를 이전하였다.

서울의 중앙총본부는 1926년 9월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인권해방, 일반 사회단체와 손잡고 합리적 사회 건설할 것, 형평운동의 원활화, 백정의 당면한 실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 등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별동 기관으로 각지에 형평청년회를 조직하고, 아동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학우동맹과 형평여성단체를 운영하는 한편 기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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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백정의 처지

백정은 가축잡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알려져 있으나 버드나무 가지로 바구니를 엮는 고리 백정, 가죽으로 신을 만드는 갖바치, 칼로 죄인의 목을 자르는 망나니도 모두 백정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 화척이라 불렀는데, 이들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조선 세종 때 일반 백성들을 지칭하던 ‘백정’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노비 외의 천인들을 양인으로 취급해 군대나 토목 공사에 동원할 인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이 점차 백정이라 불리기를 꺼리면서 결국 백정은 도살업자 등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백정은 의복과 복장에서부터 차별을 받았다. 남자는 일반인처럼 갓이나 망건, 털모자를 써서는 안 되고 상투도 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산발을 하거나 일반인이 부모 상을 당하였을 때 쓰는 패랭이(평량갓)를 써서 백정임을 드러내야 했다. 패랭이의 끈도 구슬이나 베 조각을 쓰지 못하고 종이 꼰 것만 써야 했다. 여자는 비녀를 꽂을 수 없었다. 가죽신을 만드는 것이 직업이었으나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고 짚신이나 헝겊신을 신어야 했다. 백정은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었고, 돈이 있어도 비단옷을 입거나 지붕에 기와를 올릴 수 없었다. 백정은 이름에 인·의·효·충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쓸 수 없었고, 석(石)·피(皮)·돌(乭) 등 좋지 않은 뜻의 글자를 사용해야 했다. 

사는 곳도 제한을 받았다. 백정은 일반 백성과 섞여 살지 못하고 특정 지역에 모여 살았으며 통행증 없이는 이동할 수 없었다. 일부 지역은 백정의 마을 출입을 막기 위해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달고 다니게 했다. 일반인과 나란히 걷지 못했고, 일반인 집에 갈 때는 무릎을 꿇고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백정은 어린아이라 해도 평민에게 ‘생원님, 서방님, 도련님, 아기씨’ 하는 존댓말을 써야 했고, 일반인은 나이에 상관없이 백정에게 반말로 대꾸했다. 평민과 백정의 결혼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백정끼리 혼인하였으며, 결혼식에서 백정 신랑과 신부는 안장 놓인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었다. 장례 때 상여를 이용하지 못하고 부모상을 당해도 삿갓이나 베옷을 착용할 수 없었으며 묘지도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백정들은 호적이 없어서 벼슬도 못하고 서당도 다닐 수 없었으며, 국가 구성원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한 탓에 납세나 국방의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적이 쳐들어오면 병사로 징집되는 경우가 많았고, 평소에는 지방관이나 양반에게 고기를 상납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러한 각종 차별에 저항하여 어기거나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백정은 일반 평민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일반 백성들은 마을의 규율 조직을 통해 백정을 사적으로 처벌했고, 지방 관청은 사회 질서를 깨뜨렸다는 죄로 처벌하였다. 관청의 처벌 방법도 달라 일반 죄수는 곤장대 위에 올려놓고 때렸지만, 백정 죄수는 곤장대 없이 맨땅 위에서 곤장을 쳤다.

차별 철폐 요구와 신분제의 폐지

백정을 비롯한 천민들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폐정개혁안 12개조’에서 천인의 대우 개선을 요구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 12개조
 
1. 동학 교도와 정부는 쌓인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할 것
2. 탐관 오리의 죄목을 조사하여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6. 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7. 청상 과부의 재혼을 허락할 것
8. 무명 잡세는 모두 폐지할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을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갑오개혁의 홍범 14조
 
1. 청국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확실히 자주 독립하는 기초를 확고히 세울 것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의 계승과 종실, 외척의 구별을 밝힐 것
3. 대군주가 정전에서 일을 보되,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재결하여 왕비와 후궁, 종실과 척신이 관여하지 못하게 할 것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모름지기 나누어 서로 혼합하지 아니할 것.
5.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확히 제정할 것
6. 인민에 대한 조세 징수는 법명으로 정해서 명목을 덧붙여 함부로 거두지 말 것.
7. 조세의 부과와 징수,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이 관할할 것
8. 왕실 비용을 솔선 절감하여 각 아문 및 지방관의 모법이 되게 할 것.
9. 왕실 비용 및 각 관부 비용은 일년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세울 것
10. 지방 관제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할 것.
11. 나라 안의 총명한 자제를 널리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보고 익히게 할 것.
12. 장관을 교육하고 징병하는 법을 사용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정할 것.
13. 민법과 형법을 엄격하고 명확하게 제정하고, 함부로 사람을 가두거나 징벌하지 말게 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 을 보전할 것.
14. 문벌과 지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쓰고, 세상에 퍼져 있는 선비를 두루 구해 인재의 등용을 넓힐 것. - 관보, 1894. 12. 12 - 

갑오개혁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백정의 생활

①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어 백정들도 평민처럼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00년 2월 경상남도 진주군 등 16개 군의 백정이 관찰사에게 호소하는 일이 발생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백정이 그동안 쓰지 못하던 갓을 쓰게 되었으나, 1896년(병신년) 이후에 전처럼 천대를 받아 갓도 쓰지 못하게 되었으니 다시 갓을 쓰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백정의 제소를 받은 진주 관찰사는 갓을 쓰되, 백정들의 갓끈은 일반인과 달리 소가죽으로 하라고 답했다. 이에 백정들이 항소하였으나 관찰사에게 같은 대답을 듣고 쫓겨났다. (『황성신문』, 1900년 2월 5일․17일) 

② 1896년 ‘포사규칙(庖肆規則)’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포사는 푸줏간을 뜻하는 한자로 포사규칙은 곧 푸줏간에 대한 법령이다. 이 규칙은 가축을 잡을 때 소 마리당 80전 씩 세금을 내어 정부의 허가를 받게 하고, 허가장(영수증) 없이 도살하면 벌금․자격정지․추방에 처하며, 백정들을 소속 관청에 항상 대기하게 하는 등의 강제 조항들로 구성되었으나, 임금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는 백정에게는 매우 불리한 법령이었다. 이 규칙으로 정부는 푸줏간 주인에게 걷은 세금으로 재정을 확충하고 백정을 정부 관리 아래에 두게 되었으나, 백정은 도살업이라는 천대받던 직업에 고정되었다. 그나마 백정이 푸줏간을 열려면 세금을 내고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았고 지방관의 영향력도 크게 작용하였다. 부유한 일부 백정을 제외하고 대다수 백정은 고용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백정들도 호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과 같은 호적에 등재되지 못하고 따로 도한(屠漢)호적에 기재되었으며, 직업란에 ‘도한’이라고 붉은 글씨로 썼다. 도한은 ‘소잡는 놈’을 뜻하는 말로 백정을 직업적으로 천시하고 경멸하는 명칭이었다. 즉 백정은 갑오개혁으로 법적인 차별은 벗어난 듯 했으나, 포사규칙이나 도한 호적 등으로 모욕적 칭호를 들으며 차별을 여전히 겪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관습적인 백정 차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05년 호주 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인 카를 목사가 옥봉리 교회(지금의 진주 교회)와 백정 집단 거주지역인 옥봉에 예배소를 따로 세워 의료와 교육 활동을 했다. 1909년 카를 목사의 후임으로 온 리알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귀하고 천한 이가 없이 모두 똑같다고 강조하면서 백정 신도들과 일반 신도들이 같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녀 백정들이 일반인 신도들과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옥봉리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자, 200여명의 신도들이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가 예배를 거부했다. 

③ 백정들은 ‘포사규칙’으로 가축을 잡을 때 내는 세금 부담에 더하여, 지방관의 고기 상납 요구나 양반의 수탈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도축 세금의 증가로 백정들은 그나마 천대받던 생업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전라남도 백정들이 해마다 영업 세금이 늘어 전에 100여 냥을 내던 것이 700~800냥을 내게 된 원통함을 청원하기도 했다. 충남 태안군에서 여유있게 살던 백정들이 양반들에게 잡혀가 몇 백냥씩 강제로 빼앗긴 후 집을 철거하고 마을을 떠난 사례도 있었다. 백정들이 불법으로 도살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의 생계가 몹시 어려웠던 상황을 반영한다. 
러․일전쟁 이후 ‘포사규칙’이 재정비되어 푸줏간의 관영화와 허가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조선에서 소가죽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피혁산업의 발달을 도모한 일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개항 후부터 소가죽은 조선의 수출품 중 4위를 차지했으며, 조선산 소가죽은 일본 소가죽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식민지화의 심화와 함께 일본인의 불법적인 도살장 영업도 점차 늘었으며, 일본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던 정부는 일본인의 직접적인 푸줏간 운영을 합법적으로 보호하였다. 관습적인 차별이 남아있는 가운데 식민지 경제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백정들은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수탈의 심화라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④ 백정에 대한 법적․사회적 차별은 일제시대까지 지속되었다. 1911년 일제가 한국인의 체격과 체질을 조사하는 데 일반인들이 거부하자 백정 남녀를 강제로 동원했다. 일제시대 신문 기사 중 학교 운동회에서 ‘백정각시 타고 달리기’라는 색다른 경주를 실시하면서 저고리 깃에 검은 천을 단 백정 각시를 찾아내어 소처럼 엎드려 기게 하여 치욕을 겪은 백정 여성이 자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도 백정 호적에는 도한이라고 쓰거나 붉은 점을 찍어 일반인과 구분하였다.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졸업한 장지필은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려고 했으나, 호적 등본에 '도한이라고 기록된 것을 보고는 형평 운동에 뛰어들었다. 백정 자제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들도 발생하였다. 

백정들의 형평운동

신분 차별에 개별적으로 저항한 백정들도 있었다. 박성춘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서 대중 앞에 나와 연설을 했고, SBS 드라마 <제중원>의 모델이 된 박서양은 제중원 의학교에 입학하여 최초의 백정 출신 의사가 되었다.
백정 전체의 해방을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은 형평사에서 시작되었다. 1923년 4월 25일 장지필, 이학찬 등을 비롯한 70여 명의 백정과 신현수, 강상호, 천석구 등 사회운동가들이 진주에서 조선형평사 발기회를 개최한 것이다. ‘형평(衡平)’은 백정들이 고기를 잴 때 사용하는 저울을 뜻하는 말이니, 조선형평사는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단체임을 이름에서부터 명확히 드러낸 셈이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이에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형평사의 주지이다. 우리도 조선 민족 2천만의 1인이라. 애정으로 서로 도와 생활의 안정을 꾀하며 공동의 번영을 위해 40여만이 단결하여 본사의 목적과 그 주지를 간명히 표방코자 한다.  -창립식에서 발표한 형평사 중심 취지(主旨)-

같은 해 5월 13일 진주에서 개최된 형평사 창립 축하식은 당시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천대받는 백정들을 해방시키자는 운동이 진주 최대의 공공장소에서 벌어졌다는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형평사가 전국 규모의 사회운동 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인권 해방과 권익 옹호, 공평한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백정의 호적 기록을 삭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쳐 창립 1년 만에 지사 11개소와 분사 67개소를 갖춘 대규모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형평사가 전국 단체로 발전하면서 지도부 중심 세력에 변화가 생겨 창립 1년 뒤부터 본부를 진주에 두자는 진주파와 서울로 옮기자는 서울파로 나뉘었다. 결국 1924년 3월 천안에서 열린 조선형평사 혁신 대회에서 형평운동의 혁신과 본부의 서울 이전을 결정하였다. 다음 달 서울 도렴동 144번지에 조선형평사 본부를 설치하였고, 1926년 운니동 23번지로 조선형평사 총본부를 이전하였다.
형평사 총본부는 백정 호적 기록 삭제, 공동체 성격을 지닌 상호부조, 백정의 임금 개선, 정규학교 입학 권장, 정규 교육기관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형평사원과 사원 자녀를 위한 야학이나 사설 강습소 설치, 신문․잡지의 구독 권장, 상식 향상을 위한 강연회 개최, 합리적 사회 건설을 위한 일반 사회단체와 연합 등의 활동을 펼쳤다. 별동 기관으로 각지에 형평청년회를 조직하고, 아동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학우동맹과 형평여성단체를 운영하는 한편, 기관지

형평운동과 민족운동

백정들의 형평운동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형평운동을 반대한 일반인과 백정들의 충돌이 자주 신문에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1923년 충북 제천에서 형평운동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형평분사 창립 축하식장을 습격하여 형평사원 백정들을 폭행하고 강제로 패랭이를 씌우고 목에 줄을 매어 시내 거리를 끌고 다녔다. 천안 입장 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백정 자제에 대한 교육 거부가 교직원과 일반 학부형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진영〔김해〕에서는 행상들이 한 정육 상인에게 “지금까지 백정은 백정이고, 양반은 양반이다”라고 말하여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를 중재하던 형평사원에게도 폭행을 가하였다. 김해에서 백정과 일반인의 결혼 문제를 두고 농민들이 백정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거부하여 형평사원들의 집 70여 채를 파괴했으며, 익산에서 ‘도한’이라고 기재된 차별 호적이 발견되어 삭제된 사건도 있었다. 

형평사원과 일반민들이 대립했을 때 일제 경찰은 “일본에도 에타(穢多, 사람이 아니라는 뜻의 히닌(非人)이라고도 불렸던 불가촉천민인 부락민)라 하여 일반민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들이 있으며, 그들은 그 어떤 것에도 성공한 적이 없다. … 형평사도 이와 같으니 … 백정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우리가 즉시 해산시킬 것이다”라며 일반민들을 옹호하여 다툼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제천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백정들을 폭행하고 평량립 착용을 강요했지만 일제 경찰은 이러한 사건들에 무관심하여 업무 태만을 보여주었다. 일제는 형평사의 활동을 감시하기도 했다.
 
"전조선 형평학우대회, 천안에서 성황으로 개최"

학문의 세계에 푹 빠진 조선 각지의 형평 학생으로 조직된 형평학우 정기 총회가 8월 9일 오전 11시 반부터 천안 형평사에서 개최되었다. 이 정기 총회에는 전라, 강원도 등지에서도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정각이 되자 천안 경찰서 고등계 주임 이하 4~5명  경관의 참석 아래 경찰 고등계 주임으로부터 몇 가지의 주의의 말이 있은 후, 학우동맹  이선동군의 의미 깊은 개회사로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각지에서 보내 온 축하글 중 군산과 원주를 비롯한 다수에서 온 축하문은 내용이 불온하다하여 경찰에게 압수당하고, 나머지는 전부 낭독했다. 대회 진행 중에 일어난 경관의 문서 압수는 본 형평사 정기 총회를 무시하는 행동이라며 김용택군이 저항하였는데, 경관을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범했다며  말다툼이 있었다. 이후 2~3인의 내빈 축하가 있었고 뒤를 이어 회원들이 소감을 말했다. 이 중 군산에서 온 13세의 이분례는 “우리도 인생이다. 우리는 이 계급을 벗어나기로 굳세게 노력하자”는 말에 일반인도 많은 찔림을 받았다. … 오후 3시 반에 만세삼창으로 폐회하였는데 회원들은 8월 10일 개최할 입장 형평사 제4회 기념 총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쏟아지는 폭우를 무릅쓰고 입장을 향해 출발했다. …   『중외일보』(1927년 8월 11일)-
 
심지어 일제 당국은 사건을 조작하여 형평운동의 주요 세력 중 일부에게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대거 검거하였다. 일제는 특히 일본에서 불가촉천민으로 갖은 차별을 받던 부락민들의 인권 단체인 수평사와 형평사의 연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신문은 일반인과 형평사 백정들의 충돌을 보도하면서 일제 경찰의 대응을 비판하고 형평사 출범과 전국적인 조직 확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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