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독립운동 국가수호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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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본부 터(민족 협동 전선의 구축과 좌절)
신간회 본부 터(민족 협동 전선의 구축과 좌절)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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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46-1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4]
현재 상태  멸실 / 도로에 편입되어 기업은행 종로지점 앞으로 현재 버스 정류장이 들어서 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민족 독립운동 진영은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양 진영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민족주의 진영에서 물산 장려 운동과 같은 경제적 자립 운동이 좌절되자 완전 독립에서 일부 후퇴하여 일제에게 자치권을 얻는 방법이 모색되었다. 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타협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자치운동 여부를 둘러싸고 민족주의자들의 분화가 일어났다. 당시 언론에서는 자치를 주장하는 이들을 ‘우익 민족주의자’, 반대하는 이들을 ‘좌익 민족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각각 타협적, 비타협적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자치 운동이 전개되자 이상재(李商在), 안재홍(安在鴻) 같은 조선일보 계열과 천도교 구파 등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3·1운동 이후 급속하게 성장했던 사회주의자들과 협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세력이 확대되었던 사회주의 진영에서도 중국에서 국공 합작 운동으로 성공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한 것을 목격하고 민족 협동 전선을 적극 구상하고 있었다.

읽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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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읽기 - 1)

민족주의의 세력의 분화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운동의 분화는 실력 양성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나타났다. 1910년대 대부분 실력 양성론의 입장에 섰던을 주장했던 국내의 민족주의자들은 1920년대 초 이른바 ‘문화 운동’이라는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초반 ‘문화 운동’의 중심 세력은 동아일보와 천도교, 수양동맹회, 조선청년연합회 등이었는데, 일제의 ‘문화 정치’ 내에서 청년회 운동, 교육 진흥 운동, 물산 장려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민족주의 계열 중 일부가 실력 양성 운동만을 독립을 기약하는 유일한 길로 여겼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실력 양성도 중요하지만 비타협적 정치 투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전자는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에 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민족주의 우파’ 또는 ‘타협적 민족주의’로 분류된다. 반면 후자는 사회주의 운동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주의가 계급주의 우선으로 흐르는 것을 비판하는 세력으로 ‘민족주의 좌파’ 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불린다.
민족주의 내부의 의견 차이가 더욱 커지게 된 이유는 자치 운동론의 등장이었다. 1923년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아무런 성과 없이 좌절되자, 이 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의 중 일부가 운동 방향을 전환하여 정치적 측면에서 일정한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하였다. 동아일보 측에 의해 자치 운동이 은밀하게 모색되었던 것은 1922년 하반기쯤이었다. 1924년 초 동아일보에 실린 이광수가 쓴 사설 「민족적 경륜」은 “조선 내에서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 이 결사로 하여금 당면한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장래 구원한 정치 운동의 기초를 만들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합법적 정치 단체를 조직하여 총독부를 상대로 한 타협적인 자치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5. 읽기 - 2)

신간회의 창립 과정

민족주의자들이 자치론을 둘러싸고 분화된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은 1924년 전국 각지에서 사상 운동, 노농 운동, 청년 운동 단체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창립되었고, 1925년 4월에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적대적 시각에서 선회하여 1924년에는 “타협적 민족 운동은 절대로 배척하며 혁명적 민족 운동은 찬성한다.”는 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세력이 위축된 민족주의자들은 위기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26년 6·10만세 운동 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 사이의 연대가 더욱 적극적으로 모색되었다. 1926년 9월에는 서울청년회 계열의 사상 단체인 전진회 회원과 조선 물산 장려회 회원들이 조선 민흥회를 출범시켰다. 특히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의 연합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정우회가 11월 15일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였다. 정우회는 이 선언문에서 ‘분파 투쟁의 청산과 사상 단체의 통일’,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전환과 민족 협동 전선의 전개’ 등을 주장하였다. “타락하지 않은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하여 적극적으로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표명한 것이다.
이 선언으로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 간의 협력이 급속도로 추진되었고, 1927년 1월 초 권동진, 홍명희, 박동완, 이갑성, 한기악 등이 조선일보사에서 회합하여 신간회 발의를 합의하고, 다음과 같은 강령을 마련하여 1927년 1월 19일 27인의 명의로 신간회가 정식 출발하였다.

-.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
-. 우리는 단결을 견고히 한다.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250여 명과 방청인을 합쳐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신간회 창립 대회가 열렸다. 이로써 민족 협동 전선 운동이 일차적인 결실을 보았다.

5. 읽기 - 3)

신간회의 활동

신간회의 창립 당시 임원진은 다음과 같았다.

회장 : 이상재
부회장 : 권동진
서무부 총무간사 : 권태석
재무부 총무간사 : 박동완
출판부 총무간사 : 최선익
정치문화부 총무간사 : 신석우
조사연구부 총무간사 : 안재홍
조직부 총무간사 : 홍명희
선전부 총무간사 : 이승복

신간회는 창립 후 폭넓은 지지를 받아 1927년 12월 27일 지회 100개소 기념식을 개최했다. 신간회 지회는 1928년 2월에 123개, 1929년 2월에는 144개로 급증했고, 해산될 무렵인 1931년 5월에는 150여 개에 이르렀다. 회원 수는 1928년 2월 15일에 2만 여 명, 1929년 2월에는 3만 여 명, 1931년 5월 15일 해산 시에는 3만 9,914명이었다.
신간회의 각 지회는 각 지역 청년 단체들과 민중 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고, 각 지방 신문 기자들도 적극 참여해 24개의 지회가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지국에서 결성되었다. 지회에서는 웅변 대회와 연설회 개최, 야학 개설, 강좌 개설 등의 계몽 수단을 통해 대중의 의식 개발에 노력하였다. 또한 생존권 수호의 차원에서 소작 쟁의 지원, 어민들의 이권 보호, 수재민 구호 운동, 광주 항일 학생 운동 당시 학생 동맹 휴학 지원, 일본인 이민 반대, 수리 조합 설치 반대 또는 횡포 타파, 최저 임금제의 확립, 원산총파업 등을 지원하고, 노동 조건과 임금에서의 민족적 차별 철폐 등 전영역에서 활동하여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였다.

5. 읽기 - 4)

일제의 대응

신간회는 합법 단체였기 때문에 처음에 일제는 신간회를 관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신간회의 활동이 여러 방면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급속하게 전국 각지에 지회가 세워지자 일제는 당황하였다. 더욱이 지방 조직 회원의 상당수는 사회주자로서 노동․농민․청년 운동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는 급기야 1928일 2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신간회 정기 대회를 금지하였다. “반항적 기운을 선도하고 민족적 반감을 유발”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방의 대부분 지회에서는 일제의 탄압을 대중 투쟁으로 철회시켜야 마땅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중앙 본부는 온건한 노선을 택하였다.
1929년에도 일제는 정기 대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대응하여 신간회 각 지부는 1929년 6월 복대표 대회(復代表大會)를 열었다. 원래 각 지회에서 회원 수에 비례하여 대표 회원을 선출하고, 그 대표 회원들이 본부에 모여 정기 대회를 개최하여 규약을 개정하고 임원을 개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정기 대회가 금지되었으므로 수개의 인접 지회가 합동으로 대표, 즉 복대표(復代表) 1인을 선출하고 복대표들이 모여 정기 대회를 대신하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반수 가까운 사회주의자가 간부로 선출되었고는데 집행위원장 허헌(許憲) 역시 사회주의자였다. 신간회의 허헌 체제는 이전 시기에 비해 더욱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이에 비례하여 일제의 탄압도 가중되었다.

5. 읽기 - 5)

신간회의 해소

192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세력은 민족주의 세력이 개량화되어 간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1930년 국제 공산주의 단체 코민테른의 자매단체 프로핀테른의 「9월 테제」에서 신간회를 개량주의 단체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세력의 상층 연합에 의한 통일 전선 방침을 폐기하고, 대중 투쟁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통일 전선 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후반기부터 1930년까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신간회 해소 문제가 논의되었다.
한편, 1929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신간회 본부와 경성지회 간부들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대규모의 민중 운동으로 확산시키려는 이른바 ‘민중 대회’를 계획하였다. 1929년 12월 13일로 계획된 민중 대회가 일제에게 사전 발각되어 44명의 회원이 검거되는 ‘민중 대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신간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신간회의 회원 수는 오히려 늘었으나, 1930년대 들어서 새로이 구성된 신간회 집행부의 ‘온건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사실상 집행부의 중심 역할을 했던 김병로가 자치 운동과 협력하는 방안까지 제시할 정도였다. 이러한 신간회 본부의 온건화 노선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경성지회가 본부와 맞서면서 양자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자, 신간회 각 지회는 해소 찬성론과 해소 반대론으로 갈리게 되었다.
신간회의 해소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조직 대결로 치달았다. 1931년 5월 15일 경성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간회 제2회 전체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임시 집행부가 선임되었는데, 모두 해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해소안이 제출되었으나 경찰의 제지로 찬반 토의는 금지되었다. 투표 결과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으로 해소안이 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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