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독립운동 국가수호 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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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방리 경찰관주재소 터 - 이수흥 의거지(일제 경찰을 향해 분노의 총탄을 날린 청년 운동가)
현방리 경찰관주재소 터 - 이수흥 의거지(일제 경찰을 향해 분노의 총탄을 날린 청년 운동가)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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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주소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현방로 62
현재 상태  현재는 이천경찰서 백사분소로 사용되고 있다.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으로 무장독립투쟁사에서 가장 큰 성과를 보였던 만주지역 독립군은 연이어 일어난 경신참변, 자유시 참변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하였다. 이후 독립군은 만주 지역에서 다시 조직을 정비하면서 독립 운동 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 독립단,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대한 독립 군비단 등 여러 단체가 만주에 흩어져 있었는데, 이렇게 분립된 상태로는 제대로 된 독립 전쟁을 펼칠 수 없을 것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에 주요 8개 독립군을 통합하여 대한통의부(이하 통의부로 약칭)가 설립되게 되었다.
하지만 통의부 내부에서 이념의 대립과 인선을 둘러싼 갈등이 나타났다. 이에 회의를 느낀 통의부 내 의용군 군인들은 대일 무장투쟁에 보다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표를 파견하고 임시 정부 산하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로 약칭)를 결성하게 되었다. 참의부는 설립 초기부터 무장투쟁에 주력하였는데, 이는 만주지역에 설립되었던 대표적인 무장단체인 3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에서 벌인 항일 무장투쟁 가운데 참의부의 활동이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더라도 참의부가 무장 투쟁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의부의 무장 투쟁은 만주지역에서의 활동과 국내진공작전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대부분 국내진공작전에 집중하였다. 참의부의 무장대원들은 주둔 중인 남만주 지역에서 가까운 압록강을 건너 주로 평안도 지역에서 경찰서, 관공서 등과 같은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을 공격하고, 일제와 전투를 벌였다.
이에 참의부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했던 일제는 참의부에 대한 기습 공격을 결정하였고, 1925년 3월 고마령 지역에서 군사회의를 열고 있던 참의부를 기습 공격하게 된다. 그 결과 참의부는 참의장 최석순이 적탄에 희생되고, 4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붙잡히는 큰 희생을 당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만주지역 독립군들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1925년 6월 만주 군벌 장쭤린(장작림張作霖)과 비밀 협상을 벌여 한인 독립 운동 단체의 해산에 대한 협조, 독립 운동가의 무장 해제 및 체포 후 일본으로의 인계 등을 골자로 하는 소위 미쓰야협정을 체결하였고, 이후 만주 지역의 무장 투쟁은 급속도로 위축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수흥은 고마령 참변에 동료를 잃은 것에 대한 분노, 위축된 만주 지역 무장 투쟁의 분위기를 다시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국내에서의 무장 투쟁을 계획한다. 이후 일제 식민 통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고, 특히 자신의 고향이었던 경기도 이천에서는 현방리 경찰관 주재소와 백사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일제 식민 통치 가담자와 협력자를 처단하는 활동을 벌인다. 이수흥이 무장 투쟁을 벌였던 현방리 경찰관 주재소는 현재 이천경찰서 백사분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 앞에는 일제시대 이래 위치 변동이 없이 현재까지 면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는 백사 면사무소가 남아있다.

읽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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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읽기 - 1)

고마령 참변의 아픔을 딛고 식민 통치의 심장으로 향하다.

이수흥(1905~1929)은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연안이며, 아버지는 이일영이다. 아버지 이일영은 최익현의 제자로서 대한제국 말 일제의 행태에 분개하여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수흥은 이천 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3세에 자퇴하였으며, 14세부터는 승려 생활을 하였다. 19세가 되어 승려 생활을 청산하고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이 독립 운동을 지휘할 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신명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효율적인 무장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개로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들을 하나로 합쳐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곧 연합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통의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통의부와 의군부로 갈라지게 되었고, 통의부 의용군 중 일부가 상하이의 임시 정부와 교섭하여, 임시 정부 산하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로 약칭)를 결성하게 되었다.
참의부는 1923년 결성된 이후 그 세력이 약해진 1925년까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 대한 저격 사건,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 지역에 대한 국내진공작전 등을 벌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 참의부에 만주로 건너갔던 이수흥도 참여하게 된다.
참의부가 끊임없이 평안북도 지역에 몰래 잠입해 일제 경찰서, 주재소 및 관공서를 습격하여 일제의 공권력을 약화시키고, 그 지역민에 대한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벌이자 일제는 참의부를 기습 공격하여 약화시킬 작전을 구상하였다. 일제는 1923년 3월 참의부가 주둔하고 있던 고마령으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일제의 공격으로 집안현 고마령에서 회의 중이던 참의부 수뇌부 중, 참의부의 참의장 최석순 등 4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붙잡히는 참사가 발생하게 되었다.[고마령 참변]
참의부를 약화시킨 일제는 만주 전역에서 독립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1923년 6월 만주의 군벌 장작림과 비밀 교섭하여 한인 독립 운동 단체의 해산에 대한 협조, 독립 운동가의 무장해제 및 체포 후 일본으로의 인계 등을 골자로 하는 소위 미쓰야협정을 체결하였다. 미쓰야 협정 이후 일본군에 이어 중국 관헌의 추적에도 시달리게 된 독립군의 무장 투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참의부 2중대 특무정사의 직을 맡고 있던 이수흥은 권총 두 자루를 품고 일제 식민 통치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경성으로 향하였다.

5. 읽기 - 2)

경찰 병력 3천명이 동원된 수색 작전을 신출귀몰하게 따돌리다.

고마령 참변 이후 아버지처럼 섬기던 스승인 채상덕이 “권총 2 자루를 준비해 뒀으니 이럴 때일수록 안중근을 본받으라”라고 말한 뒤 자결하자, 이수흥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수흥은 채상덕의 유언을 지키고, 침체된 무장 독립 투쟁의 불씨의 되살리고자 홀로 걸어서 경성으로 향하였다.
경성으로 가던 중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1926년 7월 6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발참리 김상렬의 집에 들어가 독립 운동 군자금 500원을 제공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상렬이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거절하자 군자금 모집에 실패하였다.[황해도 평산군 사건]
경성에 잠입한 이수흥은 만주로 떠날 당시 총독부 급사로 일했던 친척 유남수를 통해 총독 암살을 도모하려 했지만, 이미 그가 일을 그만두고 이천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후 이수흥는 유남수를 찾아 이천으로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이천으로 향하던 도중 동소문 파출소 앞에서 보초 근무 중이던 일제 경찰 토쿠나가 마사루에게 권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었다. 이수흥은 즉시 권총을 꺼내 일제 경찰을 저격하여 중상을 입히고 급히 현장을 벗어났다.[동소문 사건]
동소문 사건 이후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져 총독을 암살하려던 경성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이수흥은 친척이었던 유남수, 유택수 형제와 상의하여 독립 운동 자금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투쟁의 방향을 선회한다. 이는 이천 및 안성이 예로부터 곡창 지대로서 부자들이 많았던 곳이라는 점이 감안된 것이었다. 우선 이수흥은 안성의 부호 박승륙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으로 1926년 9월 그의 집을 찾았다. 박승륙의 아들 박태병을 만난 자리에서 이수흥은 조선 독립 운동을 위해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박태병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이수흥은 박태병을 사살하고 그 길로 안성을 떠나 잠시 누이의 집에서 몸을 피신하였다.[안성 부호 박승륙 집 사건]
여주로 간 이수흥은 여주에서 식산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이민웅을 찾아가 마찬가지로 독립 운동 자금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민웅은 자선 사업에 종사하고 있어 자금 조달이 어렵겠다고 핑계를 대며 이수흥의 독립 운동 자금 요구를 교묘히 빠져나간다.[여주 이민웅 사건]
이후 이민웅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은 이수흥은 이민웅을 처단하기 위해 그가 경영하고 있던 식산회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회사의 안팎으로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하여 처단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제 식민 통치를 돕고 있는 일제 경찰들을 처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까이에 있던 이천경찰서 현방리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들이 모두 도망해버리는 바람에 일제 경찰을 사살하려는 목적은 물거품이 되었다.[현방리 경찰관 주재소 사건[
주재소 공격이 실패한 후 다시 이민웅의 회사를 찾아갔으나 이미 모두 퇴근해버려 이민웅 처단이 어렵게 되자, 이수흥은 현방리 경찰관 주재소 앞에 위치해 있던 백사 면사무소로 들어가 숙직 중이던 면서기를 저격하였다.[백사 면사무소 사건]
이러한 일련의 이수흥의 활동들은 국내진공작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집과 일제 식민 통치의 하수인인 일제 경찰 응징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 질서를 교란시키고, 국내외 동포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수흥의 활동은 1926년 11월까지 계속되었고, 일제는 이수흥을 잡기 위해 현상금을 걸고 3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수색 작전을 전개하는 등 동분서주하였다. 심지어 당시 이천경찰서 카와마타 서장은 이수흥의 신장이 5척 단신이라는 말을 듣고 관내에 거주하는 신장이 5척되는 사람들을 모조리 조사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이수흥은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서울, 경기 지역에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대담하게 독립 운동을 펼치던 이수흥은 마침 아버지 이일영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자식된 도리로 몰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현상금에 눈이 멀었던 친척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이수흥의 체포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화제가 되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도 호외로 다루어졌다. 이후 경성으로 이송된 이수흥은 배후를 추궁하는 일제 경찰의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그곳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5. 읽기 - 3)

재판장에서 일제 식민 통치에 당당하게 맞서다.

1928년 6월 이수흥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식민지 조선의 심장부인 경성과 경기 일대의 치안을 혼동에 빠뜨렸던 이수흥의 공판은 사람들의 커다란 관심이 되어 새벽부터 방청객이 몰려들었다. 이수흥에 대한 사건을 담당했던 종로경찰서는 경관 30여명을 재판소 주변과 법정 내부에 추가 배치하는 등 한국 민중들이 동요할 것에 대비하였다.
이 재판에서 이수흥은 조선에 들어온 이유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내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대관을 암살해서 국체를 변혁하기 위해서였다. 안중근 선생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을 본받고 싶었다.”라고 당당히 대답하였다. 결국 이수흥은 일본측 검사가 공소장에 밝힌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 살인미수, 총포화약취체령 위반 등을 이의 없이 수용하였고 일제의 재판부는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약 2년 동안 세상의 이목을 끌어왔던 한 청년에게 사형이 판결된 것이었다.
이수흥은 사형을 언도받고도 공소권을 포기하여 사형 당하기를 자청하였다. 1심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공소권을 포기한 사람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친 강우규 의사, 그리고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던 허위가 있었다.
1929년 2월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이수흥과 함께 체포된 유택수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 이수흥은 사형 집행일 오전 무엇인가를 예감한 듯 한시 한수를 지었고, 아울러 일본인 교화사(敎誨師, 형무소에서 죄수를 상담하여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을 하는 종교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 신념에 대한 연설을 오랜 시간 쏟아내고, 교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나이 25세, 제2의 안중근을 꿈꿔왔던 한 청년의 바람이 채 결실을 보지도 못한 채 끝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죽은 그에게도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동대문 경찰서 형사부장이 직접 유골을 안성까지 호송했고, 매장 과정까지 일제경찰들의 감시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추후 그의 묘를 감시할 사람들까지 지정해놓았다.
비록 압록강을 건널 때 그가 품었던 총독 및 고관대작 암살이라는 대의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일제 식민 통치의 중심부인 경성과 경기 일대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한 이수흥의 활약은 침체되어 있던 1920년대 후반 무장 독립 투쟁사에서 한줄기 빛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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