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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공립보통학교 터 동맹 휴학지(등교 거부를 통한 초등학생들의 항일 투쟁)
밀양공립보통학교 터 동맹 휴학지(등교 거부를 통한 초등학생들의 항일 투쟁)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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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 3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282-12]
현재 상태  없어짐 / 그 자리에 여전히 학교가 들어서 있으나 일제시기 건물은 아니다.

1920년대는 '학생 운동의 시대'라고 할 만큼, 3·1운동 후 많은 학생들이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대항하는 등 다양하고 활발한 학생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동맹 휴학, 비밀 결사 조직, 학생 단체 조직, 문화 계몽 운동, 가두 시위 등을 통해 학생들의 권익을 대변하고 민족의 당면 문제를 풀어가려 하였다. 이 가운데 등교 거부, 수업 거부 등의 집단 행동을 통해 식민지 교육의 문제를 드러내며 저항한 동맹 휴학은 1920년대 학생 운동의 가장 일상적인 투쟁 형태였다
동맹 휴학은 일본인 교장을 비롯한 교원들의 모욕적 언어 사용과 같은 학교 안의 사소한 문제나, 일제 식민지 노예 교육, 특히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나 총독부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하고, 민족 독립을 부르짖는 민족 운동의 성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따라서 사소한 동맹 휴학일지라도 이는 한 학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한국인의 교육 문제이자 민족의 문제로 여겨졌다.
1920년대 동맹 휴학은 ① 교장 및 교사 배척, ② 교육 방법 및 교과 과정 개선 요구, ③ 학교 시설 확충, ④ 학교 승격 요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가운데 교장 및 교사 배척은 동맹 휴학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었으며, 학생들이 가장 많이 불만을 갖고 있던 문제였다. 당시 사립보통학교를 제외한 관립학교와 공립학교는 일본인 교사가 많았으며 교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따라서 관립학교와 공립학교의 동맹 휴학은 일본인 교장의 불성실, 폭언, 모욕, 구타 등의 이유로 발생되었고, 일본인 교사의 불친절, 폭언, 폭행 등이 원인이 되었다.
교육 방법 및 교과 과정 개선 요구는 일제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었다. 당시 일제는 동화교육(同化敎育)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 민족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우리 민족의 언어, 역사, 풍습, 제도 등을 없애거나 왜곡시켜 가르쳤다. 일본의 의도대로 만든 국정 교과서로 가르치도록 하였으며, 교과 과정에서도 우리 국어(당시엔 ‘조선어’)와 국사(당시엔 ‘조선사’), 지리 과목을 없애거나 시간 수를 줄이는 대신, 일본어와 일본 역사의 시간 수를 늘리거나 새로 만들었다.
학교 시설 면에서 일본인을 위한 교육 기관인 소학교․중학교의 시설에 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의 시설이 너무 보잘 것 없고 부족하였다. 이에 대한 불만이 동맹 휴학으로 나타났으며, 동맹 휴학을 통해 학교 시설 확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학교 시설 문제만 가지고 독단적으로 동맹 휴학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학교 승격 요구는 학년 연장과 학교 종류를 고치려는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은 수업 연한에 있어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을 차별 대우하였다. 일본인 교육 기관인 소학교는 6년, 중학교는 5년으로 합계 11년이었는데 비해, 한국인 교육 기관인 보통학교는 4년(뒤에 5년), 고등보통학교는 4년(뒤에 5년) 합계 8년으로 하였다. 학교 종류에 있어서도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제외한 사립학교는 잡종 학교(갑종․을종 학교 등)라는 명칭으로 갖가지 차별을 두었다. 그리하여 잡종 학교에 해당하는 학교에서는 이를 고치기 위해 일제에 대항하였다.
1920년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각종 학교들이 일으킨 동맹 휴학은 ① 노예 교육 철폐 ② 조선 역사의 교수 ③ 교내에서의 조선어 사용 ④ 학생회의 자치 허용 ⑤ 언론·집회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물론 교사 배척이나 시설 확장 요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 학교나 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맹 휴학보다는 식민지 교육,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민족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동맹 휴학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동맹 휴학의 성격이 변하였다.

읽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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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읽기 - 1)

밀양공립보통학교의 만세 시위와 동맹 휴학

밀양공립보통학교(현재의 밀양초등학교)는 개화기인 1897년 11월 1일 이 고장 출신이자 개화 인사였던 손정현(孫貞鉉)에 의해 설립된 사립 개창학교(開昌學校)에서 발전하였다. 당시 밀양공립보통학교는 근대 학교로써 밀양 지역 신문화(新文化)의 산실 역할을 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밀양 지역 민족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전개된 3·1 독립 만세 운동에 자극을 받은 밀양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다음 날인 3월 14일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은 학교 직원들이 가로막는 것을 뚫고 거리로 태극기를 흔들며 뛰쳐나와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에 200여 명의 민중들이 호응하여 시위대는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이날의 만세 시위가 비폭력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경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으며, 주요 인물들을 구속시키고 징역형을 언도하였다.
3·1 만세 시위 당시 밀양공립보통학교는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현 밀양시 내일동)에 있었는데, 3·1운동의 영향 때문인지 바로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삼문리(현 밀양시 삼문동)로 이전하였다. 내일동에 있었던 학교 자리에는 밀양경찰서가 들어섰다가 이후 시장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내일동에서 삼문리로 옮긴 밀양공립보통학교에서 1922년 1월 12일과 13일 동맹 휴학이 일어났다. 이 학교 4학년과 5학년 학생 오십여 명은 일본인 교사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일본인 교사를 배척(排斥: 거부하여 밀어 내침)하기 위한 동맹 휴학 투쟁을 전개하였다. 1월 12일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일본인 교사 아라키[荒木]가 하는 말도 듣지 않고, 한꺼번에 학교를 빠져나와, 삼문리 청년운동장에 모여 담임 교사를 배척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후 일제히 밀양군청으로 몰려가 교사를 해임 처분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군청에서는 학생들에게 이런 행동은 학생으로서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며 공부하기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4·5학년생 전원은 도리어 동맹 휴학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군청에서는 “교장이 부재 중(不在中: 자기 집이나 직장 따위에 있지 아니한 동안)이니 돌아오면 조치하겠다.”면서 등교를 권유했으나, 학생들은 듣지 않고 1월 13일에도 전부 동맹 휴학을 하였다. 학생들은 “교사의 사죄가 없으면 등교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결국 군청이 학부형들을 설득함으로써 사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수 있었다. 1월 13일 군청 학무주임이 학교로 찾아가 학부형들을 모아 여러 가지로 설득하였는데, 그 결과 학부형 측에서 군청의 설득을 받아들여 학생들을 등교시키기로 하였다. 또 학무주임은 1월 15일 연계소(蓮桂所: 과거 급제한 이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했던 곳)에서 학부형 회의를 열어, 앞으로 “아이들을 엄하게 감독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협박하였고, 그 후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학부형 대표가 학교로 찾아가 임시 교장을 맡은 아리키[荒木]에게 사죄하였다. 학교 측에서는 우에하라[上原] 교장이 돌아올 때까지는 잠시 문제 해결을 접어두고 학생들을 공부시키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1월 16일에는 부모들의 설득을 받은 학생들이 모두 다 등교함으로써 동맹휴학은 5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5. 읽기 - 2)

밀양의 민족 교육 운동

한말의 민족 운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선각자들에 의한 근대 학교 설립 운동이다. 당시 선각자들은 근대 학교 설립에 앞장섰는데, 밀양 지역 최초의 근대 학교는 문산 손정현(聞山 孫貞鉉, 1847~1905)에 의해 1897년 11월 1일 설립된 사립 개창학교(開昌學校)였다. 사립 개창학교는 조선 시대 향촌 사회의 자치 기구인 향청(鄕廳)에 속한 관청 부속 건물에 세운 학교로, 개창학교의 설립에는 향반(鄕班: 지방에서 약간의 능력과 힘을 지닌 양반) 출신의 개화적인 유학자들이 관여하였다. 1901년 11월 1일 공립 개창학교로 인가받았다가, 1906년 8월 27일 제정된 <보통학교령>에 따라 밀양공립보통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일제의 교육령에 따라 밀양제일공립심상소학교, 밀양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해방 이후에도 계속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쓰다가 정부의 교육 정책에 따라 1996년부터 밀양초등학교가 되었다.
밀양공립보통학교는 밀양의 대표적인 교육 기관으로 수많은 독립 운동 인사들을 배출하였는데, 밀양청년회와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청년 운동을 전개한 윤치영(尹致衡), 표문호, 윤세주(尹世冑), 박고지, 정동찬(丁銅燦), 박임수 등은 바로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거나 이 학교 출신(윤세주는 밀양공립보통학교를 거쳐 동화학교에서 최종 졸업)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는 이 학교가 지역 민족 운동의 중심지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19년 3월 13일 밀양 읍내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으며, 다음날인 3월 14일 160명의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이때 주요 인물들이 구속되어 김병환(金餠煥), 이장수(李章守), 정동찬, 박만수(朴萬守) 등은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 4월 2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상당수가 참여한 밀양소년단 단원 40여 명이 윤태선을 선두로 야간에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면서 시가 행진을 벌였다. 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윤태선, 강덕수, 박소수, 윤수선, 김성수 등 소년단원들은 구속되어 1년 6월에서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대 밀양의 사립학교는 동화학교, 동진학원, 계성학교, 경신학교, 일신학교, 집성학교 이렇게 6개교였는데,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11개교인 동래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이는 밀양 지역이 경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개화와 혁신의 분위기가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밀양의 근대 학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개창학교 뿐만 아니라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되던 1908년 9월 설립된 사립 동화학교(同化學校)이다.
사립 동화학교는 1910년대 비밀 결사 운동과 1919년 3·1운동, 1920년대 의열단 투쟁, 나아가 일제 강점기 밀양 지역 청년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화학교를 졸업한 김원봉(金元鳳), 윤세주, 김상윤(金相潤), 최수봉(崔壽鳳) 등은 의열단 활동을 펼친 인물(김원봉과 윤세주는 동화학교에 편입하기 전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님)이다. 또한 1919년 3월 11일과 12일에 이어 13일 펼쳐진 밀양 읍내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투옥된 김소지(金小池), 박소종(朴小宗), 정동찬(丁銅燦) 등도 동화학교 출신이다. 이렇듯 동화학교는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민족 교육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 정책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렇게 1910년대부터 사립학교의 민족 교육을 탄압하여 왔던 일제는, 밀양 지역의 3·13 만세 운동 직후 사립학교가 민족 운동의 중심지가 되자 더욱 심한 탄압을 하였다.
이와 같이 밀양 지역 근대 학교인 개창학교(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학교는, 국내외를 비롯한 밀양 지역 청년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에 적잖은 기여를 하였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민족 교육의 요람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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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사(1922.01.17.) 밀양공보맹휴(密陽公普盟休)
출처 : 동아일보 기사 필자 직접 캡쳐 편(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2011700209203014&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22 - 01 - 17&officeId=00020&pageNo=3&printNo=507&publishType=00020)

시각자료2

밀양공립보통학교 제10회 졸업생
출처 : 밀양초등학교백년사편찬위원회, 『밀양백년청사』, 밀양초등학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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