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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옥 수리조합(일제 수탈 도구로 이용된 수리조합)
익옥 수리조합(일제 수탈 도구로 이용된 수리조합)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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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주소  전라북도 익산시 평화동 55, 56, 56-5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익산시 평동로1길 28-4 일대]
현재 상태  원형 보존 / 수리조합 사무소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2층 건물이며, 현재 관사와 부속 창고가 남아 있다.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재단법인 익산문화재단이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한 일제 조선 총독부는 우리나라 토지 소유권을 재조사하는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1912~1918)을 실시하였다. 사실 일제가 토지 조사 사업을 처음 계획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었을 때부터이다. 1910년 3월 토지 조사국이 이미 설치되었으며, 강제 병합 직후인 9월 28일 토지 조사국의 사무를 조선 총독부로 옮겨, 총독부 안의 임시 토지 조사국에서 업무를 담당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1개월 간의 준비 조사를 거쳐, 1911년 11월 『지적장부(地籍帳簿: 토지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한 책)』를 만드는 일을 시작하였다. 1912년 3월 <조선부동산등기령>과 <조선민사령>를 발표하고, 이어 1912년 <토지조사령>, 1914년에는 <지세령>과 <토지대장규칙>, 1918년에는 <조선임야조사령>을 공포하면서 전국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이 실시되었다.
토지 조사 사업은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하겠다는 명분 아래 실시되었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 토지를 약탈하고, 토지세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이 사업으로 일제는 왕실과 공공 기관의 토지, 여러 사람이 함께 주인이던 토지 등 수많은 토지를 빼앗았다. 총독부는 이 토지들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후지흥업[불이흥업(不二興業)주식회사] 등 일본 토지 회사와 일본의 이민자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헐값으로 팔았다. 이에 일본인 대지주가 나타났으며, 반면 조선 농민들은 몰락하게 되었다.
조선 총독부가 대대로 누려온 조선 농민들의 경작권을 부정하고 지주들의 소유권만 보장함으로써 땅 없는 농민들이 늘어났다. 소유권과 경작권을 빼앗긴 농민들은 지주의 땅을 빌려서 농사짓는 소작인의 처지가 되었으며, 이들의 권리는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았다. 소작인들은 지주가 원하는 대로 소작료를 내야만 하였고, 지주가 요구하는 대로 지주가 내야 할 세금까지 대신 부담해야 하였다. 만약 항의라도 하게 되면 이듬해 농사는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몰락한 농민들은 만주, 연해주 등 국외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부터 일제는 쌀 생산을 늘리겠다며 이른바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다. 당시 조선은 산업, 특히 농업 분야에서 ‘개발’이 이루어지고 주요 항구들이 증축되거나 개․수축되는 등 사회 간접 자본이 확충되었다. 그 결과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고 무역량 또한 늘어나 겉으로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 성장은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지 조선인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산미 증식 계획으로 오히려 우리 농민들의 생활은 이전보다 더 어려워 졌다. 산미 증식 계획도 토지 조사 사업처럼 일제의 경제적 수탈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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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읽기 - 1)

산미증식계획

'문화 통치'를 내건 조선 총독부는 1920년부터 농토를 개간하고 경지를 정리하거나 수리시설(水利施設: 물을 관리하거나 이용하는 시설)을 확대하는 등 토지를 개량하는 한편, 종자를 개량하고 비료 사용을 확대하여 쌀과 곡식 생산량을 증대시키려는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는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 기지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1910년대 말 일본은 중화학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쌀 생산이 매우 부족하였으며, 1918년 ‘쌀 폭동’까지 발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 정부는 식민지 중에서도 특히 조선에서 쌀과 곡식의 생산을 늘리고 이를 일본에 가져와 자기 나라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 국내에 남아도는 자본을 산미 증식 계획에 투입함으로써 일본 산업이 직면하고 있던 불경기를 해소하려고 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은 토지 개량과 농사 개선을 통한 증산 계획에 중점을 두었다. 농사 개선 계획은 품종 개량, 퇴비 장려, 알맞은 시기에 씨앗심기, 잡초 제거, 병충해 방지 등을 통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토지 개량 계획은 관개 시설의 개선, 지목 변경, 개간, 간척 등으로 농사지을 땅을 확장하여 생산량을 늘리기 위함이었다.
산미 증식 계획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제1차 계획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5개년 계획으로 이루어졌으며, 제2차 산미 증식 계획은 1926년부터 1935년까지 10개년 계획으로 추진되었으나 1934년에 중단되었다. 조선 쌀의 일본 수출이 크게 늘어나 일본의 농업이 위기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산미 증식 계획은 1934년 중단되었다가 1937년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여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일제는 군량미 확보 때문에 다시 조선 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1940년 다시 산미증식계획을 수립․추진하였다. 이를 제3차 산미 증식 계획이라고 한다. 제3차 산미 증식 계획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실시되었으며, 높은 소작료와 강제 공출(供出: 정부에 농업 생산물 등을 의무적으로 내어놓음) 등의 형태로 조선 쌀을 수탈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34년까지 쌀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농민의 소득도 함께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해 밭을 논으로 바꾸고, 비료를 사거나 수리 시설 이용료를 지불하는 데 드는 돈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늘어난 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쌀이 일본으로 빠져나가면서 농민 1인당 쌀 소비량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만주에서 들여온 잡곡이 겨우 그 빈틈을 메웠으나, 농사짓는 농민들조차 쌀 부족으로 고통 받았다.
우리 농민이 먹기에도 쌀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조선 쌀은 계속 일본에 팔려나갔다.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지주제 때문이었다. 넓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 주고 수확의 50%에 가까운 소작료를 받았는데, 그렇게 받아낸 쌀의 대부분이 시장을 통해 일본으로 팔려 나갔다. 더욱이 일제는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지주의 소작료 수탈을 눈감아 주었다. 일제는 조선을 쌀 공급 기지로 만들면서 한편으론 지주를 친일 세력으로 육성하려는 의도까지 가지고 있었다. 결국 농업 개량으로 쌀 생산 증대를 추구한 산미 증식 계획은, 지주의 소유권을 절대적으로 보장한 토지 조사 사업과 마찬가지로 지주에게는 유리한 정책이었으며, 농민들에게는 몰락을 촉진하는 암 같은 정책이었다.

5. 읽기 - 2)

익옥수리조합

전라북도 만경강을 중심으로 하는 만경평야와 동진강을 중심으로 하는 김제평야가 펼쳐져 있는 호남평야는 우리나라 곡창 지대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다양한 수리시설과 함께 수리조합(水利組合: 농사지을 땅을 가진 이들이 물을 관리하거나 저수지와 뚝 등을 쌓은 일 따위에 관한 사업을 목적으로 조직한 조합)이 만들어졌다. 1906년 4월 탁지부령으로 수리조합 조례가 공포되고, 1908년 2월 18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옥구서부수리조합(沃溝)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후 1909년 임익수리조합(臨益: 임피․익산)과 임익남부수리조합, 1910년 임옥수리조합(臨沃: 임피․옥구)과 전익수리조합(全益: 전주․익산), 1913년 고부수리조합(古阜) 등이 만들어졌는데, 모두 일본인 대지주들에 의해 설립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1912년 <토지조사령>에 따라 토지 조사가 진행되자 국가 소유의 농지(農地: 농사짓는 땅)나 아직 개간되지 않은 땅을 싸게 사는 방법으로 농지를 차지하였다.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일제는 1920년부터 한반도를 식량 기지화로 삼을 목표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면서 토지 개량 사업을 위해 기존의 수리조합을 합쳐 크게 확장하는 등 대규모 수리조합을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20년 2월 5일 임익남부수리조합과 임옥수리조합이 합쳐져 익옥(益沃: 익산․옥구)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
당시 임익남부수리조합과 임옥수리조합이 관리하는 물이 부족하여 농사에 지장을 주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경강 상류인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에 대규모 댐을 축조하여 저수지를 만드는 계획을 구상하였다. 대아저수지(대아호, 대아리저수지)를 건설하여 농사지을 물을 공급하고 농민들에게 물세를 받아내려는 속셈이었다. 또한 군산과 익산 지역의 불이농장(不二農場)에 물을 공급하려는 의도였는데, 이를 위해 임옥수리조합과 임익남부수리조합의 통합부터 추진하였다. 익옥수리조합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 목적에서 설립된 것이었다.
익옥수리조합의 대아저수지 공사는 전국 최초의 댐 공사이자 가장 큰 규모의 대공사였다. 익옥수리조합에서 공사를 직접 추진하였으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쳐 1922년 12월 25일에야 댐 공사가 완료되었으며, 이듬해 6월 16일에 준공식이 치러졌다. 이외에도 익옥수리조합은 수로 공사 사업을 펼쳤는데, 이때 우리나라 최초로 경지 정리를 실시하였다. 1925년 12월 익산군 오산면 목천리에 목천토지개량계(木川土地改良契)를 조직하여 경지 정리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토지 개량 사업은 조선 총독부의 막대한 자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조선 총독부에서는 1929년에 익옥수리조합의 토지 개량 사업을 지원하고 구역 변경 및 확장 공사비를 싼 이자에 대출해 주는 등 여러 가지 특혜를 주었다.
이와 반대로 농민들은 수리조합으로부터 피해를 받았다. 수리조합에서 실시한 경지 정리를 비롯하여 댐과 수로 건설 등 수리시설 확충으로 농업 생산성이 늘어나긴 하였다. 그러나 수리조합은 토지 및 식량 수탈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으며, 과다한 공사비와 물세 징수는 지역 농민의 몰락을 가져왔다. 1921년 9월 대아저수지와 관련하여 농경지가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게 되자 농민들은 익옥수리조합 반대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수리조합의 착취에 따른 수리조합 반대 운동은 익옥수리조합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익옥수리조합은 창설 이후 단층 일본식 목조 건물을 사무실(사무소)로 사용하였는데, 1930년 3월 새 청사(廳舍: 관청의 사무실로 쓰는 건물)를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8월 12일에 준공하였다. 이 때 건립된 청사가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1호로 지정된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이다.
익옥수리조합은 1941년 4월 1일 임익수리조합, 전익수리조합, 옥구서부수리조합과 함께 전북수리조합에 합병되었다. 전북수리조합은 1962년에 전북토지개량조합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70년에 다시 전북농지개량조합(전북농조)으로 개칭하였다. 전북농조에서는 1975년에 익옥수리조합의 남쪽에 본부 청사를 신축·준공하였다. 이로써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는 그 기능을 새 청사에 내어주고 부속 건물이 되었다. 전북농조는 이후 1983년 대아리에 새로운 댐 건설을 착수하여 1990년에 완공하였으며, 1996년 전라북도 익산시 목천동 전주-군산 간 도로변에 새로운 청사를 지어 이전하였다. 이후 익산시 평화동에 위치한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와 창고’는 매각이 결정되어 한국농촌공사(한국농어촌공사) 익산 지소에 소속되었다가 현재는 익산문화재단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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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1

익산지역 항일운동사적지
출처 : 독립기념관 DVD 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_항일독립운동사적지07_전북 djb_04

시각자료2

익옥수리조합 사무실 입구
출처 :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사이트(http://sajeok.i815.or.kr/) - 익옥수리조합

시각자료3

익옥수리조합 사무실 전면 우측
출처 : 국내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사이트(http://sajeok.i815.or.kr/) - 익옥수리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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