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서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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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1,300여 평의 대지에 우물 정(井)자 형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는 박창현씨 댁으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나, 집 마당에 주춧돌 등이 남아있다. |
| 당시주소 | 강원도 양양군 양양면 임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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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임천2길 22-8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2권 및 「이석범 판결문」 등에서 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양양의 만세운동 주도자인 이석범은 이교완의 집을 본거지로 삼았는데, 1916년지적도와 현재 지도를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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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석범(李錫範)/최인식(崔寅植)/김명기(金明基)/김필선(金弼善)/김재구(金在龜)/김규용(金圭容)/김계호(金啓鎬) |
| 관련 내용 | 임천리는 함평 이씨의 문중 마을로 양양 만세운동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 이석범은 1919년 3월부터양양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인 최인식과 그의 처남인 김명기와 함께 유학자가 접근하기 힘든 서민사회에 만세운동을 위한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양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을 포섭하였다. 기독계에서는 양양감리교회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별도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임천리의 시위계획과 통합 추진되었다. 1919년 4월 2일 이석범은 문중의 큰 부자였던 이교완(李敎完)의 집으로 본거지를 옮겨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렇게 만세운동을 추진하던 중 4월 3일 군수 이동혁(李東赫)과 군속 심운택(沈雲澤)이 일본 관헌과 함께 임천리를 급습하여, 주도자인 이석범 외 22명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최인식, 김필선·김재구·김규용·김계호 등 많은 주도자들이 도망쳐 양양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