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본문영역

통합검색

사적지 검색어 ""에 대한 검색결과 입니다.
  • 독립운동
  • 국가수호
  • TwHP
  • 나라사랑 역사의 길
  • 사진
독립운동 (검색결과 : 25건) +
이미지

안재홍 고가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진위군 고덕면 두릉리 646번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안재홍은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중학부를 마치고 같은해 9월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 학감과 1917년 중앙YMCA 교육부 간사를 역임하였다.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11월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4년 시대일보 논설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투신해 조선일보 주필과 부사장, 사장 등을 두루 거쳤다. 1927년 1월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우파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이후 각종 필화사건,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사건, 1938년 5월 흥업구락부사건,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사건 등에 연루되어 1919년 이후 20여 년 동안 모두 9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1950년 제2대 총선에 출마하여 고향인 평택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
이미지

애양원교회 신사참배 거부운동지

애양원교회(愛養園敎會)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여수노회 소속 교회로 애양원의 부속 전도실로 출발하였다. 애양원교회는 1908년 3월 광주에서 설립되었으며, 1928년 2월 여수로 이전하였다. 1934년 화재로 인해 골조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전소되자 1935년 4월에 재건하였다. 손양원(孫良源, 1902~1950)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칠원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915년에는 일제의 궁성요배(宮城遙拜)를 거부하여 퇴학당했으며, 서울 중동중학교에 재학 중 아버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자 다시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17년 10월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일본 유학 중에 기독교 교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귀국하여 경상남도 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1938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7월 여수의 나병원인 애양원 내에 있는 애양원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맞서며 일제의 폭정과 우상숭배를 비판하였...
이미지

부산공설운동장 - 부산학생의거지

1940년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식은 전년도 우승교(동래중학교)가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한국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다. 동래중학교와 부산제이상업학교 학생들의 항의도 번번이 묵살당하였다. 폐회식에서 일본인 심판장이 일본인 학교를 우승학교로 발표하자, 판정의 부당함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항일의거 시발의 신호탄이 되었다. 양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 1,000여 명이 시가행진과 일본인 심판장 관사 습격을 결의하였다. 심판장 관사에 학생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심판장은 도망가고 없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투석으로 외등과 관사의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렸다. 밤 10시경, 부산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학생들을 현장에서 검거하였다. 11월 24일 두 학교는 일제 경찰...
이미지

의병전투지 - 사나사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한층 격해진 의병투쟁에 맞서 일제는 수비대, 헌병, 경찰을 총동원해서 적극적인 정찰과 토벌을 강행했다. 그러나 의병들의 신속한 유격전술을 따라 잡지 못하여 토벌작전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당황한 일제는 의병의 근거지, 보급품공급지, 심지어 의병들이 통과한 지역까지도 살육, 방화하는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이러한 만행 때문에 민가는 물론 많은 고찰들이 방화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1907년 10월 27일 신라 경명왕 7년(923)에 창건된 고찰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던 의병부대 약 150여 명은 연안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들을 토벌하려고 파견된 재경성 보병 제51연대와 교전하였다. 일본군은 이때 보복책으로 사나사를 방화하여 전소되었다. 전소된 사나사는 2년 뒤인 1909년에 일부 복구되었으나, 1950년 6·25전쟁 중에 다시 전소되었다. 1956년 일부 복구작업을 거친 뒤, 1993년에 대웅전과 지장전을 재건하였다.
이미지

태인의병 유숙지 - 구암사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창의한 최익현 등은 곧장 태인으로 이동하여 태인향교에 임시 지휘부를 설치하고 장정을 모아 군비를 확충하였다. 이튿날 태인향교를 출발 정읍관아에 도착하여 군비를 확충한 뒤 내장사로 가 유숙하였다. 이날 고창 출신의 고석진(高石鎭)이 포군 30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태인의병에 합류하였다. 당시 군사의 수는 300여 명에 달하였으나 제대로 무장한 이는 많지 않았다. 내장사에서 하루를 머문 의병은 다음날 아침 좌·우익을 나누어 군사연습을 전개하여 군의 모습을 정돈하기 시작하였다. 이른 아침에 내장사를 출발한 일행은 험한 산길을 타고 노령산맥을 넘어 30리를 행군한 끝에 구암사(龜巖寺)로 들어갔다. 태인의병이 이곳에 진을 친 것은 지세가 험하고 튼튼하여 군사를 주둔할 만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며 향후 진로를 모색한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장차 남원으로의 진격을 염두에 두고 일단 순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구암사는 623년 숭제(...
국가수호 (검색결과 : 30건) +
이미지

유엔군 평화공원

6·25전쟁 참전 유엔군 전사자의 묘지는 1951년 경상남도 부산시 대연동에 설치되었다. 유엔군사령부에 의하여1951년 창설되어 1955년 유엔총회가 국제연합기념묘지로서 지명한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유엔군묘역이다. 유엔군사령부에 의해 개성·인천·대전·마산 등지에 있던 여섯 곳의 묘지로부터 유해를 이장, 1951년 안치했다. 처음에는 미국·벨기에·프랑스 등 1만 1,000위가 있었으나 대부분 본국으로 봉환되고, 2000년 말 현재 호주·캐나다·네덜란드 등 11개국의 2,293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이 묘지 내에는 예배당(1964년 건축)과 전시장, 사무소(1968년 건축)등이 있다. 특히 예배당은 여러 나라 용사들의 종교를 고려한 한국 건축가의 설계에 따라 유엔이 건축한 것으로 건축학적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1966년 부산시민이 봉납한 동양식의 정문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무덤마다 고인의 기록을 담은 묘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부산광역시 문화유적지로 지...
이미지

남제주 강병대교회

강병대(强兵臺)교회는 1951년 3월 21일 육군 제1훈련소가 모슬포에서 출범된 이후 이곳에서 훈련을 받는 장병들의 정신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당시 훈련소장이었던 육군 소장 장도영에 의하여, 제주현무암 석조의 목조 함석 지붕으로 300㎡의 규모로 1952년 5월에 건립되었다. 제1훈련소는 북한군에 밀려 퇴각하던 1951년 1월 문을 연 뒤 국군 신병을 배출해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곳에는 1956년까지 대략 50만 명의 신병들이 훈련받았으며 이들 중 많은 장병들이 강병대교회를 거쳐 갔다. 육군 제1훈련소인 강병대가 창설되면서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부 요인과 외국 사절단들이 강병대교회를 방문한 바 있다. 1952년에는 교회부설 샛별유치원이 개원되어 장병들이 직접 봉사활동을 전개하였고, 1965년부터는 공군 제8456부대의 기지교회로 사용되면서 교회부설 신우고등공민학교를 열어 1981년 폐교될 때까지 장병들이 교사가 되어 지역 청소년들의 향학열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
이미지

옛 육군 제1훈련소

6·25전쟁 당시 수도 서울 재탈환을 위해 전투병을 길러냈던 육군 제1훈련소는 북한군에 밀려 퇴각하던 1951년 1월 21일 문을 연 뒤 국군 신병을 배출해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군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많은 병력들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신병들을 빠르게 훈련시켜 내보내야 했지만, 한반도 본토에서는 마땅히 그럴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제주도에 육군 제1훈련소를 만들어 신병을 양성하게 되었다. 당시 대정 지역에 제2훈련소가 있었고, 중문 인근 예래지역에 제1훈련소가 있었다. 1953년 휴전이 되면서 대정지역에 있던 제2훈련소는 논산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육군 제1훈련소는 1951년 1월부터 1956년까지 문을 닫을 때까지 대략 50만명의 신병들이 훈련받았다. 현재 훈련소 내에는 당시의 지휘소 본관건물, 막사, 의무대 건물 등이 남아있으며 도로변에 훈련소 정문기둥이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밖에도 이곳은 육군 제1훈련소가 창설되기 이전 1946년에 육군 제9연대가 창설...
이미지

옛 해병대 훈련소

제주 해병대훈련소는 한국 해병대가 최초로 훈련을 받았던 곳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해군은 제주 모슬포에서 한국 해병대를 훈련시켰으며, 최초로 훈련을 마치고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 500여 명이 1950년 7월 15일 제주항을 출항하여 7월 16일 군산항 전투를 수행하였다. 또한 제주 해병훈련소는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역사적인 군사 유적이다. 육군 제1훈련소 바로 옆에 위치해 있으며, 해병대 훈련소 병사 건물과 함께 세면장, 연병장, 사열대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훈련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으며, 6·25전쟁과 관련한 상징물로서의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훈련소에서는 1950년 8월 3일 제주도 북국민학교에서 입교식을 가지고 해병대에 입대한 여교사와 여학생 126명 중 100명이 훈련을 하였으며, 수료 후 실무부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6·25전쟁 기간 동안 이 훈련소에서는 많은 해병대들이 훈련을 수료하여 각 전선에서 눈...
이미지

유엔군 화장터

연천 유엔군 화장터는 6·25전쟁 당시 운용된 유엔군의 화장터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화장터는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의 규모로 보아 양측의 전선이 휴전협상으로 비교적 고착화 된 시기인 1951년 7월 이후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쟁기간 동안 많은 유엔군 전사자들을 화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연천지역은 미 제1군단 미 제3사단 작전구역이었으며, 휴전협상시기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 영연방 제1사단, 미 제3사단, 미 제25사단, 국군 제9사단 등 5개 사단을 작전 통제하여 개성 서남방의 서해안으로부터 철원 서북방에 이르기까지의 주저항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 시기 국군과 유엔군은 통상 중대 내지 대대 규모의 전투정찰대를 편성하여 북한군 진지에 대한 위력수색과 교란을 목적으로 국부적인 공격을 실시하였으며 주저항선에 배치된 전방 연대는 북한군의 야간 침투를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 수색정찰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양측은 이 시기 휴전을 대비하여 보다 유리...
사적지 배움터 (검색결과 : 3건) +
나라사랑 역사의 길 (검색결과 : 5건) +
  • 전쟁 그리고 비극의 시작-미아리에서 혜화동까지 약도보기
  • 한강과 전쟁의 기억-노량진과 용산 약도보기
  • 6·25전쟁의 전환점, 인천상륙작전의 현장을 가다 약도보기
  • 평화의 도시 화천, 6·25전적지를 가다 약도보기
  • 동해를 품은 통일의 꿈, 고성에 가다 약도보기
사진 (검색결과 : 2건)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천읍 삼방로 95 전화: 041-560-0441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14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