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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검색결과 : 301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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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한 홍주의병은 천제를 지내고 의병의 편제를 보강하였다. 아울러 대장 민종식(閔宗植)은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모병을 지시하였으며, 이에 호응하여 인근의 사민들도 의병에 합류하였다. 홍주성 점령 소식을 접한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가와요시미치에게 명령을 내려 일본주차군 제60연대의 보병 2개중대와 기병 반개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소대를 파견하여 홍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5월 30일 밤부터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홍주의병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결국 참모장 채광묵(蔡光默)을 비롯하여 성재평·전태진·서기환·전경호 등 3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홍주성전투 직후 홍주군수로 부임한 윤시영(尹始永)의 일기에 의하면, 일본기마병이 의병을 추격 사살하였으며, 체포된 의병을 심지어는‘작살’하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1949년 홍주경찰서과 소방서원들의 식목 행사 중홍성천 주변에서 유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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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부자 순국지 - 외암리

이남규(李南珪, 1855~1907)는 1855년에 태어나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동학 교수·사헌부 지평·공조참의·안동부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1900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예산의 사저로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906년 홍주의병이 결성되자, 그는 여기에 선봉장으로 참여하였으며,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을 자신의 집에 은신시키면서 홍주의병의 재기를 도왔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곽한일·박윤식 등과 함께 공주감옥에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남규를 일단 풀어주었으나 1907년 9월 26일 다시 기마대를 파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일본군 기마대는 압송 도중 온양(현 아산)의 외암동에서 그를 살해하였고, 이를 막던 아들인 이충구(李忠求)와 하인마저도 함께 살해하였다. 그가 순국한 사실은 민족지인『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일자)에 기사화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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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집 - 모덕사 중화당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면암(勉菴)이다. 그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한 최익현은 이후 예조좌랑·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73년에는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10년 권세를 붕괴시켰다. 또 1876년에는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 나가‘5불가소’를 올려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였다. 최익현이 의정부 찬정 등의 관직을 사양하고 충남의 정산으로 이거한 것은 1900년 음력 4월의 일로 벽지에서 은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곳에 거주하면서 1905년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렸으며, 1906년에는 노구를 이끌고 전라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대마도에서 함께 유배된‘홍주9의사’들과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으나, 그해 11월(음) 유배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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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전투지 - 홍주성

홍주의병은 1906년 3월 청양군 정산면 천장리에서 재봉기하였으나, 청양 합천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이후 홍주의병은 5월 9일 부여의 지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민종식(閔宗植)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고, 부대를 정비한 후 5월 13일 서천관아를 점령하였다. 이들은 남포읍성 전투에 성공하여 병사를 의병에 귀순시키는 등 의병을 모집하면서 5월 19일 홍주읍에 들어와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민종식은 이후 천제를 지내고 의병의 편제를 보강하였다. 아울러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모병을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여러 차례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가와요시미치에게 명령을 내려 조선주차군 제60연대의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를 파견하여 홍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결과 홍주의병은 5월 30일 밤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공격으로 이튿날 새벽 결국 채광묵(蔡光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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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의병 창의지 - 무성서원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철도 이용 거부·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촉구하였다. 1906년 3월 그의 제자인 전북 고창 출신의 고석진(高石鎭)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자 최익현은 태인의 임병찬(林炳瓚)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같이할 것을 권하였다. 몇 차례의 서신 왕래를 통해 임병찬의 뜻을 확인한 최익현은 당시 거주하고 있던 충청남도 청양을 떠나 태인으로 향하였다. 임병찬을 제자로 받아들인 최익현은 회문산 북록의 상종성에 약 2개월간 머물며 거의를 준비하였다. 창의소를 지어 고종에게 올린 최익현은 임실·순창·담양 등지로 사람을 보내 동지를 규합하여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마친 뒤 그 자리에서 창의를 발의하니 따르는 자가 80여 명에 달하였다. 이 서원은 원래 최치원(崔致遠)을 제향하기 위한 태산사(泰山祠)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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