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한종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1980년대까지 생가가 일부 남아 있었다. 현재 생가는 2000년 복원된 것이다. |
| 정의 | 대한광복회 충청도지부장 김한종이 태어나 1918년 체포 당시까지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한광복회 |
| 관련 인물 | 박상진/우재룡/채기중/김경태/김재창/이철영/김좌진 |
| 관련 내용 |
김한종(金漢鍾, 1883~1921)은 일제강점 후 충청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916년 7월 김경태(金敬泰)·김재창(金在昶)과 함께 부여의 이철영(李哲永) 집에서 조선총독 및 고관들의 암살을 모의했다. 때마침 조선총독이 부여지방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조선총독 처단을 모의하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피신하게 되었다. 그는 경주로 박상진을 찾아가 광복회에 참여해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우재룡(禹在龍)과 회합을 갖고 독립운동의 방법을 협의하고 충청도 지부조직에 착수했다. 그가 책임을 맡은 충청도지부는 광복회 지부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했고,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충청도지부장으로써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활동을 펼쳤다. 서울에서 박상진과 함께 김좌진(金佐鎭)을 만주 부사령으로 파견하기도 하고, ‘고시문(告示文)’을 별도로 작성해 충청도지역에서 자금을 모집하고 예산·연기·인천에 곡물상으로 위장한 광복회 거점을 설치했다. 또한 식민지배에 안주하려는 친일세력들을 처단해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친일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8년 1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한종 생가는 2000년에 해체·복원되었으며, 2007년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
| 참고 문헌 |
「박상진 등 40인 예심종결결정」, 공주지방법원, 1918년 10월 1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상진 등 19인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년 9월 2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상진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20년 9월 1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동걸, 「대한광복회 연구」, 『한국민족주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284~285쪽. 이성우, 「광복회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71~8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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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
|---|---|
| 주소 | 충남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70 |
|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장신신흥길 283-12 |
| 위치 고증 | 「박상진 등 19인 판결문」에 의하면 본적과 주소가 모두 신흥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광시면 신흥리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후손인 김경식의 고증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














사당(내부)
멸실 전 김한종 생가 사랑채
김한종 생가 옆에 조성된 사당
김한종 생가 앞에 세워진 일우김한종기념관
김한종 생가(오른쪽)
김한종 생가
김한종 생가(왼쪽)
김한종 생가 전경
김한종 사형집행 관련기사(『동아일보』, 1921년 8월 13일)
대구형무소 수감 중 부친에게 보낸 친필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