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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의병부대 집결지 - 영호정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건물
상태 복원 / 영호정은 조선 순조 7년(1807) 이집경이 건립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이후 그의 후손인 이범우(1990년 애족장)가 1954년 중건하였다. 의림지 제방 남쪽에 건축되어 있으며, 영호정 안내문에 이강년 의진과 관련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정의 1907년 8월 천남전투 승리 후 이강년이 부하 장수들과 정세를 논했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천남전투
관련 조직 호좌의병 
관련 인물 이강년(李康秊), 민긍호(閔肯鎬), 조동교(趙東敎), 오경묵(吳敬黙), 정대무(丁大武), 김상태(金尙台), 김학수(金鶴洙), 백남규(白南奎), 하한서(河漢瑞), 윤기영(尹基榮), 이중봉(李重鳳), 이용로(李容魯), 이세영(李世榮)
관련 내용 헤이그특사 파견을 구실로 1907년 양력 7월 20일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였으며, 이어 7월 24일에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국내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강년은 1907년 5월 의병을 다시 일으켰으나 용소동 전투에서 참패하여 부상치료에 전념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고종의 강제퇴위와 납치 소문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민긍호가 해산한 군인들을 이끌고 제천으로 들어왔으며, 조동교, 오경묵, 정대무 등도 휘하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제천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들 의진은 연합하여 공동작전을 펼쳤고, 1907년 8월 13일(음력 7월 5일) 이강년은 아후봉 방면에서 일제 군경의 배후를 급습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천남전투).
천남전투 이후 이강년은 의림지에 있는 영호정에서 40여 연합 의진과 함께 정세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각 진의 여러 의병장들이 이강년에게 도창의대장을 권유하였다. 이강년은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인 참판 김학수(金鶴洙)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인격과 지위가 겸비된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하며 사양하였다. 이에 김상태가 이강년이 도창의대장을 맡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그만두겠다고 강력히 청하면서, 1907년 8월 19일(음력 7월 11일) 이강년이 도창의대장에 임명되었다. 이강년은 진을 정비하면서 김상태를 중군으로 삼고, 백남규를 우선봉, 하한서를 좌선봉, 윤기영을 전군, 이중봉을 우군, 이용로를 좌군, 이세영을 감군으로 삼았다. 이강년이 이끄는 부대는 유인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싸웠던 호좌의진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게 ‘호좌의진(湖左義陣)’이라 불리었다.
참고 문헌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279~28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 1984, 226쪽.
박민영,『의병전쟁의 선봉장 이강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98~100쪽.
박정수・강순희 편, 구완회 역,『국역 창의사실기』, 다운샘, 2014, 39~40쪽.
구완회, 「정미의병기 湖左義陣의 편제와 의진 간 연합의 양상」,『한국근현대사연구』43, 한국근현대사학회, 2007.
오영섭, 「고종 측근 심상훈과 제천지역 의병운동과의 연관관계」,『한국근현대사연구』35, 한국근현대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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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제천군 현좌면 모산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241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영호정은 의림지 남쪽 제방에 위치하며 조선 순조 7년(1807) 이집경(李集慶)이 건립한 후 한국전쟁 때 파괴된 것을 이집경의 후손인 이범우가 중건하여 그 자리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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