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채기중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2005년 12월 생가가 복원되었다. |
| 정의 | 광복회 채기중이 1873년 태어나 1906년 경북 영주군 풍기면 동부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광복회 조직/1917.11 장승원 처단 |
|---|---|
| 관련 조직 | 풍기광복단/광복회 |
| 관련 인물 | 채기중(蔡基中·蔡基仲)/강순필(姜順必)/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박상진(朴尙鎭)/김한종(金漢鍾)/장승원(張承遠) |
| 관련 내용 |
채기중(1873~1921)은 1873년 7월 7일(음력) 함창군 이안면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34세가 되던 1906년 고향을 떠나 영주군 풍기면 동부동으로 이사하였다. 채기중은 1913년 강순필·김병렬·정만교·김상오·정운홍·정진화 등과 함께 풍기에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모집을 위해 강원도 영월의 일본인소유 중석광(重石鑛)에 광부로 위장·잠입하여 자금탈취를 시도하였으며, 자산가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펼쳤다. 또한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 독립군과도 연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채기중은 박상진을 만나 조금 더 적극적인 항일투쟁 방법을 모색하였다. 1915년 8월 광복회(光復會)가 결성되자, 채기중은 경상도 지역 책임자로 광복회의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는 등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1916년 9월 총사령 박상진이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자, 예산의 김한종을 가입시켜 충청도 조직을 재건하는 등 세력만회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채기중은 군자금모집을 위해 1917년 11월 칠곡군의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였다. 이 일로 광복회가 발각되자, 채기중은 중국 상해로 망명을 계획하던 중 1918년 체포되어 1919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21년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독립신문』, 1919년 10월 11일,「광복회원 판결」. 『매일신보』, 1919년 9월 24일,「광복회사건 공소판결」.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183쪽. 채광식,『채기중선생전기』, 소몽선생숭모회, 2001, 3쪽. 김희곤,『박상진자료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이성우,「광복회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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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함창군 이안면 소암리 |
|---|---|
| 주소 | 경북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 291-1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소암2길 25-50 |
| 위치 고증 | 『고등경찰요사』에 출신지가 함창군 이안면으로 되어 있다. 소암리 전 이장을 지냈던 채중철 및 동네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으며, 2005년 12월 이안면 소암리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














채기중 관련기사(『독립신문』, 1919년 10월 11일)
채기중
채기중 생가 후면
채기중 생가 전경
채기중 생가 원경
채기중 생가 안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