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원주진위대 전투지 - 원주우편취급소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강원 감영 후원으로 복원되어 있다. |
| 정의 | 1907년 8월 5일 원주진위대의 공격 대상이었던 원주우편취급소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민긍호(閔肯鎬) |
| 관련 내용 |
원주 정미의병의 시작은 1907년 8월 일제에 의한 한국군의 해산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서울의 시위대를 해산하고 이어 각 지방의 진위대를 순차적으로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당시 일제가 한국군을 해산하려 했던 것은 한국에 남아있는 소수의 군대라도 일제의 한국침략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의 시위대 장병들은 1907년 8월 1일 해산식을 가졌으나 원주진위대는 8월 10일에 해산될 예정이었다. 8월 5일 원주진위대 병사들은 특무정교 민긍호의 지휘 하에 일제히 봉기하였다. 아울러 원주 주민들이 진위대 군사들의 봉기에 합세함으로써 원주지역의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8월 5일 오후 2시에 원주진위대 지휘부는 봉기를 알리는 비상나팔을 불어 약 3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선 원주우편취급소를 습격, 계속하여 경찰을 습격하였다. 이날은 마침 원주 장날이어서 의병봉기에 뜻을 같이한 원주 주민들도 자연히 합세하였다. 민긍호 이하 정교(正校)·부교(副校)·참교(參校) 급에서는 다수가 참여하였다. 또한 장날에 운집한 읍민과 장꾼 중에서 의병부대의 대열을 확충했다. 당시 원주진위대가 봉기했다는 소식을 듣고 윤기영은 진위대 무기고에서 꺼낸 소총과 탄약을 입수하였다. 그리고 소총 1600여 정, 탄환 4만여 발을 꺼내어 병사들에게 분배하여 무장시켰다. 이것은 원주 정미의병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597쪽. 오영교·왕현종, 『원주독립운동사』, 혜안, 2005. 심철기, 『근대전환기 지역사회와 의병운동 연구』, 선인, 2019. 왕현종,「1907년 이후 원주진위대의 의병참여와 전술변화」,『역사교육』96, 2005. 왕현종,「원주 정미의병 운동의 전개와 단계적 변화」,『원주 정미의병 연구』, 원주시, 2008, 36-45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원주군 본부면 |
|---|---|
| 주소 |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7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폭도사편집자료』(『독립운동사자료집』3권에 수록)에 따르면“8월 5일 충주 수비대 이궁(二宮) 소위 이하 19명이 원주수비대를 해산하기 위하여 내원했다는 보(報)를 받자 이에 앞서서 근 2~3시간에 급히 부하에게 명령하여 비상 나팔을 불어 약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선 원주우편취급소를 습격, 계속하여 경찰을 습격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2009년 조사 당시 원주문화원 윤병진 사무국장의 자문을 통해 당시 원주우편취급소 자리에 원주우체국이 자리한 것을 확인하였고, 강원감영 후원으로 복원되었다. |














강원 감영 전경(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