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문용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현재의 가옥은 1970년대 개축한 것으로 당시의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
| 정의 | 만주지역에서 활발한 독립투쟁을 전개한 박문용이 태어나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0년대 항일투쟁(불변단, 조선독립군사령부)||1919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
|---|---|
| 관련 조직 | 대한민국임시정부, 불변단(不變團) |
| 관련 인물 | 안창호(安昌浩)/이동녕(李東寧)/박문용(朴文鎔) |
| 관련 내용 |
박문용(1882~1929)의 이명은 환(桓)으로 전남 보성(寶城) 출생이다. 1913년 12월 보성군 겸백면(兼白面) 면장으로 있으면서 공금 327원 6전을 조선독립암살단(朝鮮獨立暗殺團)에 군자금으로 제공하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대표 30인의 한 사람으로서 임시정부의 제2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한편, 톈진(天津)에서 항일무장단체인 불변단(不變團)을 조직하여 부단장 겸 의사부장을 맡아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상하이에서 박은식(朴殷植) 등 민족대표와 함께 선언서 및 공약을 발표하여 전 민족의 분발과 협력을 촉구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으로 귀국, 전라도지역 책임자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0년 2월 한우석과 함께 다시 상하이로 가서 안창호·이동녕 등 임시정부 간부들과 회합하고, 조선독립군사령부(朝鮮獨立軍司令部)를 설치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귀국, 결사대를 조직하여 전남 광주 본촌면(本村面)에서 활동하였다. 같은해 8월 미국 상원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 일본고관을 제거할 암살단을 조직하고 준비작업에 전념하였으나, 거사 전에 동지 한우석이 검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도 체포되었다. 1921년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박문용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우석 등 21인 판결문」, 1921년 6월 2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73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 1972, 241~243·30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0, 1976, 1047~1062쪽. 보성군사편찬위원회,『보성군사』, 1995, 155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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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10 |
|---|---|
| 주소 | 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254 |
| 도로명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겸백초암길 58 |
| 위치 고증 | 「박문용 공적조서」에 관련 사실이 명기되어 있고, 「한우석 등 21인 판결문」에 기재된 주소와 현장 조사시 박점주(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초암마을) 씨의 증언으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














한우석 등 21인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년 6월 21일)
박문용 생가 우측
박문용 생가 후면
박문용 생가 전경
박문용 생가 정면
박문용 생가 들어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