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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임병찬 유배지 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유배거처였던 집터만 남아 있다.
정의 독립의군부 순무대장 임병찬이 거문도 유배시 거처했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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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1906 중기의병/1912-1914 독립의군부
관련 조직 태인의병(泰仁義兵)/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관련 인물 최익현(崔益鉉)/고석진(高石鎭)/최제학(崔濟學)
관련 내용 전북 옥구에서 태어난 임병찬(林秉瓚, 1851~1916)은 낙안군수겸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906년 봄부터 거병준비를 위임받은 그는 6월 4일 최익현과 더불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명분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의진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일제와의 외교적 담판을 통해 국권을 되찾을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전북 태인·정읍·순창 및 전남 옥과 등을 공격하여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의진의 대오를 정비하였다. 그러던 중 순창에서 의병장 최익현과 임병찬 등 12명이 관군에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이들 중 임병찬은 감금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의 쓰시마(對馬島)섬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907년 1월에 귀국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임병찬은 1912년 9월 고종황제가 내린 밀조(密詔)에 따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그는 12월에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1914년 2월 그는 서울로 올라가 이명상·이인순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규모 항일운동을 계획하던 중 그 해 5월 임병찬·이하·이기상(李起商)·이인순(李寅淳)·전용규(田鎔圭) 등 관련자 50여 명이 체포되거나 수배되었다. 일제는 그를 절해고도인 거문도에 1년 유배형을 내렸으나, 다시 1년이 연장되어 1916년 5월 23일 유배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 문헌 임병찬,『義兵抗爭日記』, 한국인문과학원, 1986, 246-264쪽.
『매일신보』, 1915년 3월 16일,「대담교휼한 사기단」.
『高等警察要史』, 경상북도경찰부, 1934, 177-179쪽.
곽영보, 『巨文島風雲史』, 삼화문화사, 1987,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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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여수군 삼산면 덕촌리
주소 전남 여수시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임병찬의 거문도 유배와 관련된 사실은 그의『거문도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거문도 고도에서 잠시 머물다가 서도 덕촌리 원세학의 집으로 유배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현장조사 시 덕촌리에 거주하는 일가인 원용효(79세, 전남 여수시 삼산면 덕흥리 거주) 씨를 통해 원세학이 살았던 집터를 확인하였다. 현재는 그 자손들이 이사를 가고 터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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