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준연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주의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김준연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기념관도 함께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
| 정의 | 1920년대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간사로 활동한 김준연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호남친목회/조선기독교청년회/고려공산동맹/신간회/조선공산당/동아일보사 |
| 관련 인물 | 여운형/송진우 |
| 관련 내용 |
김준연(1895~1971)은 전남 영암 출신으로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8년 영암보통학교(靈巖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이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한성고등보통학교(漢城高等普通學校)(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23일 졸업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7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법학부 독법과(獨法科)에 입학하였다. 도쿄제국대학 유학 중인 1917년 12월 백관수(白寬洙) 등과 함께 호남친목회(湖南親睦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등에서 주최하는 국내외 각종 행사에서 강연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11월 3·1운동 기획과 관련하여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여운형(呂運亨)이 일본에 왔을 때 신인회(新仁會)를 중심으로 환영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그는 1926년 ‘서울파’의 전위조직인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에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4일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즈음 안재홍 등과 함께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秀) 등의 자치운동단체 조직 계획을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에 통보하여 그 계획을 무산시켰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 창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이어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당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 9월 20일 안광천의 뒤를 이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맡아 조직 개편을 단행하는 등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추격으로 그 해 11월에 사임하였다. 1928년 1월 ‘조선공산당 제3차 탄압사건’, 일명 ‘ML당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가 2월 초에 풀려났지만 1928년 5월 31일 같은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구속되었다. 1930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미결구류일수 600일 본형산입)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4년 7월 25일 형 집행 만기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에 손 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게재하였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같은 달 27일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하게 되었고 사장 송진우(宋鎭禹) 등과 함께 1937년에 사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김준연 판결문(1929.10.28) 김준연 판결문(1930.9.6.) 김상현, 「낭산 김준연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정치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7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오수열, 「낭산 김준연의 생애와 정치이념」, 『서석사회과학논총』제2집2호(통권 제4호), 조선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2009. 낭산김준연기념사업회, 『민족민주지도자 건국의 원훈, 낭산 김준연』, 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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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면 교동 |
|---|---|
| 주소 | 전남 영암군 영암읍 영암로 1498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준연 생가 위치에 대한 자료 검토 필요 -판결문 본적 : 영암군 영암면 서남리 32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30년 9월) 본적 및 생지 : 영암면 서남리 31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29년 11월) 본적 및 생지 : 영암면 교동 1-6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왜정인물 2권 : 영암면 교동리 10 □김준연 생가와 기념관은 교동리 94번지에 조성되어 있음. 이곳은 1915년 지적도상의 187~190번지 일대가 병합되어 새롭게 지번을 부여한 것으로 보임. -낭산김준연기념관 및 생가 복원 : 영암읍 교동리 94 □그런데 오수열 논문에는 교동리 187번지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옴. 김준연 「나의 길」, 「나의 소전」 등 그의 글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음 □교동리 10(垈)은 김준연 부친 김상경 소유지(1915년 지적도) □현장조사시 김준연기념관 자료 등 확인 필요 |














김준연 생가(2023년 촬영)
김준연 생가(2023년 촬영)
김준연 생가 전경(2023년 촬영)
김준연 기념관(2023년 촬영)